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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파들의 다윈 수용 1859-1930: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과학의 이해를 왜곡시키는가?

hs_paper.hwp 과학사통론 2 기말보고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9 정동욱 | 제출일 : 2004. 12. 20 | 담당교수 : 홍성욱

머리말

1859년 발표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하여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등 당대의 사회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자신들의 혁명이론을 뒷받침해준다며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다윈 이론의 온전한 이해를 방해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또한 리센코주의로 대표되는 소비에트 생물학의 문제에 대해, 맑스주의 영향에 대해 언급을 안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글에서는 리센코주의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이 다루는 시기는 ‘종의 기원’이 발표된 19세기 중반이후부터 리센코주의가 소비에트 생물학의 전면에 등장하기 직전까지이다. 따라서, 그 시기 동안 급진파들이 다윈주의를 수용한 방식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리센코주의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직접적인 관심은 당시 급진적 지식인이 가진 정치적 지향과 가치관이 과학이론의 수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먼저, 맑스와 엥겔스의 수용방식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후, 크게 두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 오갔던 논쟁을 살펴볼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다윈 이해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될 상시, 맑스는 이미 그의 유물론적인 역사관, 계급 투쟁, 잉여가치 이론 등 맑스주의의 주요한 요소들을 정식화해놓고 있었다. 즉,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거의 완비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출간 1년 뒤인 1860년 겨울에 읽었으며, 1862년 봄에 한번 더 읽었다. 콜프 주니어에 따르면, 당시 맑스는 ‘종의 기원’에 대해 세 가지 관점을 표현했다고 한다. 첫째, 그는 유기체의 진화 이론을 수용했다. 둘째, 그는 ‘종의 기원’의 유물론적 성격, 합리적 설명, 자연과학에서의 “목적론(teleology)”의 제거를 높이 평가했다. 셋째, 그는 맬서스의 인구법칙에 대한 다윈의 믿음을 비판했다.
당시 그는 그의 동료 엥겔스에게 ‘종의 기원’은 “우리 관점에 대한 자연사적 토대를 담고 있다”고 편지를 보냈으며, 또 다른 편지에서는 “다윈의 책은 매우 중요하며, 나에게 계급투쟁에 대한 자연과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다윈과 연결짓고자 상당한 노력을 했다. 1867년 겨울, 맑스는 엥겔스에게 ‘자본론’의 서평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맑스는 “(자본론이) 현재의 사회가, 경제학적으로 볼 때, 새롭고 더 높은 형태를 산출한다는 것을 증명하며, 다윈에 의해 자연과학에서 증명된 보편적인 변화의 과정이 사회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고 써주길 부탁했으며, 엥겔스는 그렇게 썼다. 또한, 1883년, 맑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듯이, 맑스는 인간 사회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자연의 역사에 대한 다윈의 관점을 인간사회의 역사에 직접 적용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맑스는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와 다르다. … 우리는 전자를 만들어 왔지만, 후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맑스주의와 다윈주의를 병렬적으로 공존시키려 했던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윈주의를 사회에 직접 적용하려는 시도, 특히 사회 다윈주의나 자유방임적 정치경제학에 대해 매우 불편해했다. 엥겔스는 ‘반듀링론’과 ‘자연변증법’에서 이러한 관점을 더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논증을 위해서 잠깐 생존경쟁이라는 이 공허한 말을 받아들여 보자. 동물이 해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수집하는 행위’까지일 뿐이나, 인간은 ‘생산을 한다’. 즉 인간은 자연이 인간 없이는 결코 생산해내지 않았을, 그 말이 갖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생활수단들을 만들어낸다. 이 사실로써 동물사회의 생존법칙들을 그렇게 거침없이 인간사회에 전용하는 어떠한 행위도 불가능해진다. 생산은 곧 소위 생존경쟁이 더 이상 순전히 생존수단을 두고서가 아니라 향락과 발전의 수단을 두고 벌어지게 되는 데까지 사태를 진척시킨다. 여기서 이미 ― 사회적으로 생산된 발전수단들에 있어서 ― 동물계로부터 나온 범주들은 전혀 적용할 수 없다.

엥겔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생산’에서 찾았으며, 그로 인해 동물계의 법칙과 범주가 인간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다윈을 비롯하여 그의 현재의 추종자들이 강조해온 것은 식물계가 동물계에게 먹이와 산소를 공급하고, 동물들은 식물들에게 분뇨와 암모니아 그리고 탄산을 공급하는 등 바로 생명계의 조화적 협력이었다. 그러나 막 다윈이 널리 인정받게 되자마자, 바로 이 사람들은 이제 어디서나 투쟁만을 본다. 이 두 견해는 좁은 범위 내에서는 정당하나, 둘 다 똑같이 일면적이고 편협하다. 죽은 자연물들의 상호작용은 조화와 충돌을 포함하며, 살아있는 자연물들의 상호작용은 의식적·무의식적 협력과 의식적·무의식적 투쟁을 포함한다. 즉 일방적으로 ‘투쟁’만을 기치로 내세우는 것은 이미 자연에 있어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 (중략) …
다윈의 생존경쟁 이론 전체는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론과 부르주아 경제학의 경쟁이론 및 맬서스의 인구론을 사회로부터 생물계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재주를 일단 부리고 나면(그런데 이러한 재주의 무조건적 정당성은 특히 맬서스의 이론과 관련해 볼 때 매우 의심스럽다) 그 다음에 이 이론들을 자연사로부터 다시 사회사로 거꾸로 도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며, 그것으로써 이러한 주장들이 사회의 영원한 자연법칙임이 입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우직한 짓이다.

여기서 엥겔스는 자연의 작동법칙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반대함과 동시에, 맬서스의 이론을 자연에 전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에도 의심을 표명하고 있다. 엥겔스는 책의 다른 부분에서, 생존경쟁에 대해 “무엇보다도 일정한 식물과 하등동물의 단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식물과 동물의 개체수의 과잉에 의해서 야기된 투쟁에 엄격히 한정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유경쟁, 생존경쟁 ― 경제학자들은 이를 최고의 역사적 성과라고 칭송해 대고 있는데 ― 이 바로 동물왕국의 정상적 상태임을 증명했을 때, 다윈은 자신이 인류와 특히 영국 국민들을 얼마나 쓰라리게 풍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며 비유적으로 사회 다윈주의자들을 비난했다.
결론적으로, 엥겔스는 자연이 형이상학이 아닌 변증법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다윈이 증명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진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졌고, 사회의 진화(진보) 메커니즘과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다윈의 이론이 변이의 원인을 설명하는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무작위적인 변이가 진보적인 진화를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맑스도 이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인간의 진화에 관련하여, 맑스는 트레마욱스(Pierre Tr maux)가 제기한 ‘지리적 환경’이 진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인이라 생각했다. 반면 엥겔스는 좀더 능동적 요인(문화, 노동)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관점은 라마르크주의에 편향된 것으로 보인다.

논쟁지점들

자연 대 인간 / 경쟁 대 협동

급진파들의 대부분은 자연이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진화는 열렬히 수용했으나, 경쟁이 그 진화의 요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해했다. 특히 맬서스의 ‘인구법칙’과 ‘생존경쟁’에 대한 비유의 직접적인 차용은 급진파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맬서스를 읽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838년 10월, 그러니까 나의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한 지 15개월 후에, 나는 우연히 맬서스의 ‘인구론’을 재미삼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동물과 식물의 습관들에 대해 오래 관찰하면서 모든 곳에서 진행되는 생존경쟁을 제대로 평가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이러한 상황 아래서는 유리한 변이는 살아남고 불리한 변이는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이 즉각 떠올랐다. 그 결과로 새로운 종이 형성될 것이다.

그의 공동발견자인 월러스도 맬서스의 인구론이 “그 당시까지 읽은 것 중 철학적인 생물학의 어떤 문제를 취급한 첫 번째 책이었으며, 그 주요 원리들은 영원히 내 것으로 남게 되었고 20년 후 생물 종의 진화의 유효한 작인에 대해 오래도록 찾던 실마리를 제공”하였으며, “그 저술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자연선택 이론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것의 독자적 발견에 대한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윈과 월러스가 사회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명의 진화에 관한 이론을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지 않거나 극히 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 다윈주의자들과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들은 다윈의 이론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려 했다. 엥겔스의 지적처럼, 다윈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는 일은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다시 맬서스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스펜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아직 출간되지 않았던 1852년에 쓴 원고에서, 사회에 적용되는 생존경쟁과 선택이 극단적 자유방임형 사회경제학으로 전환된다고 주장했다. 스펜서에 의하면, 국가는 자기 관심을 추구하는 개인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방임해야 하며, 불공평이나 불평등을 시정하거나 관행을 규제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사방에서 비탄의 상황을 낳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서 사회는 항상 신체적 약자들, 저능자들, 지진아나 결단력이 없거나 신의가 없는 사회 구성원들을 자동 소거해 버린다는 사실을 눈감아 버린 채, 선의를 갖고 있더라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정화 과정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런 타락을 증대시키는 영향력을 옹호하게 된다.” 스펜서의 주장은 멜서스의 주장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빈곤의 원인은 빈곤을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는 것이지 개인의 결함 또는 인구의 과잉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위와 같은 견해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 상태를 정당화해주는 보수적 견해로, 사회의 개혁 또는 혁명을 추구하는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급진적 지식인들은 다윈으로부터 스펜서와 같은 논의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진화에서 인간을 예외로 하거나, 둘째, 진화론에서 맬서스를 제거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진화론에서 맬서스를 제거하려는 경향은 특히 러시아에서 강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러시아가 아직 자본주의가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기는 엄청난 경쟁사회였다. 그러한 경쟁을 겪어본 적인 없는 러시아의 지식인들로서는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이라는 비유 자체가 오히려 진화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체르니쉐프스키(N. G. Chernyshevskii)의 경우, 그는 진화에서 ‘생존경쟁’을 완전히 배격하였고, 다윈주의를 반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급진적 과학자들 중 다윈주의를 완전히 반대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진화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그것의 적용을 생물계에 한정시키거나, ‘생존경쟁’이라는 비유를 최대한 삼가거나, 또는 진화에서 협동의 메커니즘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식물 생리학자인 티미리아제프(K. A. Timiriazev)는 러시아의 정통 다윈주의의 변호자였으며, 이후 생물학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에게 다윈이 말하는 ‘생존경쟁’이 맬서스의 관점과 분리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는 다윈의 인구법칙이 맬서스가 아닌 벤자민 프랭클린에 의해 먼저 발견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법칙이 자연에서만 “진보에서의 기계적 원인”으로 남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다윈도 어떠한 일관된 다윈주의자도 오늘날의 문명화된 인간에 “생존경쟁”의 개념을 확장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1890년대부터 그는 자연선택 이론을 설명하는 데 다윈의 비유를 가능한 최대한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글 “진화의 요인(Factors of Evolution)”에서는 ‘생존경쟁’이란 단어를 완전히 없앴다. 그는 점점 잔인한 “생존경쟁”보다 “조화(harmony)”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에게 “자연선택”이란 그 잔인한 경쟁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조화를 만들어가는 자연의 방식에 대한 기술이었다. 1910년, 그는 “‘생존경쟁’이라는 불편한 표현을 언급하지 않고도” 20년간 다윈주의를 방어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그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다윈에서 맬서스를 제거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람 중 크로폿킨(P. A. Kropotkin)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잘 알려진 러시아 혁명가이다. 그는 진화를 이해하는 데 “붙임성(sociability)”과 “상호도움(mutual aid)”을 중요한 용어로 들여오면서, 종 내부(intra specific)의 협동을 진화의 핵심 요소로 보았다. 1902년 ‘상호도움’이라는 책에서, 그는 새, 늑대, 사자, 설치류, 원숭이 등 자연에서의 협동의 사례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원시부족, 중세 길드, 현대의 노동조합의 구성원들 사이의 협동을 강조하면서, 앞서의 주장을 인간 역사에 확장 적용하였다. 그에게는 서구 유럽의 현재 상태는 오히려 진화의 경쟁적인 측면을 일시적으로 과장시킨 탈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진화론의 이해는 러시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선택 이론의 공동발견자인 월러스조차도 ‘생존경쟁’과 ‘최적자 생존’이 진화를 설명하는 데 불충분하거나 적합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로버트 영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두뇌와 미적·도덕적 능력들에 관해 예외를 두게 되었고, 점점 더 자연을 초월하는 어떤 힘에 의한 인간 욕구의 예견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는 효용의 원리가 인간의 진화에 대한 적절한 설명임을 이미 거부하였으므로, 더 나아가서 맬서스에서 그것이 기원했음을 거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81년 월러스는 다윈에게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이 그에게 맬서스의 법칙이 인간의 진화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음을 확신시켜주었다고 편지했다. 조지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인간이 실패한 것 때문에 자연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월러스의 생각으로는 자발적인 협동과 개혁이 사회변혁의 메커니즘으로서 경쟁을 대체했다. 그는 맬서스의 이론이 “그것에 의존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광대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데에서 조지와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는 ‘진보와 빈곤’이 “아담 스미스에 의해 한 세기 전에 이루어진 것과 동등한 진보를 정치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이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조지는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주장할 만하다”고 이야기되었다. 1898년 ‘경이의 세기’를 쓸 때까지는 미래사회에 대한 월러스의 사회주의적 희망들이 그로 하여금 사회적 경쟁을 완전히 거부하게 하였고 어떤 메커니즘도 규정되지 않은 채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갖게 했다. 말년에 와서 월러스가 “자연은 잔인한가?”라는 물음을 다시 생각하고 고통의 목적과 한계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동물세계에서의 맬서스적 경쟁을 인간의 진보에 대한 비맬서스적 견해와 양립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해결은 그 단순함에 있어 거의 데카르트적이었다. 동물은 인간보다 고통을 아주 적게 느끼거나 거의 느끼지 않으며 실제로 문명화되지 않은 종족들은 문명화된 종족보다 (고통을) 적게 느낀다는 것이었다.

또한, 월러스는 ‘생존경쟁’이라는 비유가 영국 자연학자에게도 매우 괴로운 것이었음을 토로했으며, 그 비유는 단지 “자연선택”이라는 현상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해주는 도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서, 월러스와 후커는 다윈에게 더 이상 그러한 표현을 쓰지 말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

우연 대 의지 / 유전학 대 신라마르크주의

무작위적인 변이로부터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다윈의 주장은 급진파, 보수파 모두에게 불충분한 설명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작위성과 자연선택으로부터 ‘적응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이 불충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선택’은 적응하지 못한 개체를 제거하는 데에 유용한 부정적인 요인(negative factor)일 뿐이다. 그렇다면, 적응적인 결과를 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텐데, 그것이 ‘무작위적인 변이’라는 다윈의 설명에 충분히 만족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시 말해, 변이 생성의 메커니즘이 만족스럽게 해명되지 않았다는 점이 다윈의 설명의 큰 약점이었다.
이러한 약점은 다시 다윈 스스로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868년 다윈은, 범생설(pangenesis)이라는 이론을 발표하는데, 이 이론은 적응적 변형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적인 개념에 가까웠다. 1844년 다윈은 자신의 입장을 라마르크와 구분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었다. 그러나 1872년 ‘종의 기원’ 6판이 출간되었을 무렵, 다윈은 획득형질이 유전되는가의 물음에 관해 라마르크에 무척 가까워졌다.
다윈주의의 이러한 난점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전학에 의해 보완된 것이 사실이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의 신라마르크주의의 엄청난 유행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유전학과 신라마르크주의 사이의 논쟁은 무척이나 격렬하고 진지했다. 스펜서, 핵켈 등은 어떤 미지의 힘이 생물체로 하여금 그가 처한 환경으로부터 어떤 ‘영향(impression)’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가정에 바탕하여 라마르크주의를 옹호했으며, 버틀러, 프랜시스 다윈(다윈의 아들) 등은 라마르크주의에 목적론을 강하게 도입하여 동물의 의식 또는 의지가 진화를 이끌어간다는 주장을 하였다. 물론 이들의 목적론적 사고는 창조주를 끌어들이진 않았다. 반면, 크로폿킨은 이에 반대했는데, 의식이 행위상의 ‘변형’을 통해 진화를 이끌어 가는 추진력이 된다는 논리는 잘못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삶을 하나의 ‘합목적적인 행위’로 보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러한 견해가 연관된 과정에 대한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설명을 추구할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유전학은 바이스만(August Weismann), 드 브리스(Hugo de Vries), 모간(Thomas Hunt Morgan) 등에 의해 발전했다. 1892년 바이스만은 점-플라즘(germ-plasm) 이론이라 불리는 유전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을 내놓는다. 이 이론은 종의 변이에 대한 연구에 이산적이거나(discrete) 미립자적인(particulate) 접근에 힘을 실어주었다. 1900년에 이르러, 바이스만은 34년 전의 멜델의 연구를 재발굴했을 뿐만 아니라, 유전적 변이가 연속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인 과정에 의한다는 실험적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멘델을 재평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멘델과 바이스만에 의해, 유전형질은 섞이거나 평균화되지 않으며, 뚜렷한(distinct) 단위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드 브리스는 새 변이가 갑작스레 출현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이를 “돌연변이(mutation)”이라 명명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의 장미 실험은 잡종일 뿐이었지만, 그의 연구는 모간의 연구 방향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모간에 의해 명백히 확증될 수 있었다. 모간은 초파리 실험을 통해, 무수히 많지만 작은 돌연변이들을 발견했으며, 이는 오직 (조한센에 의해 이름지어진) “유전자(gene)”의 변화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모간의 실험은 드 브리스의 실험에 비해 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모간이 엄격한 실험 위에서 돌연변이 유전학(mutational genetics)를 세웠다는 신뢰는 널리 인정받았다. 이렇게 멜델, 바이스만, 모간의 노력으로 확립된 유전학은 다윈의 진화론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엥겔스는 당대의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동시대인이었던 드 브리스나 모간의 연구에 대해 한 줄도 언급한 적이 없다. 아마도 엥겔스는 유전학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유전학을 거부한 것은 아니며, 대부분은 과학의 구체적인 내용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생물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논쟁은 보통 과학자들 내부에서 이루어졌으며 2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만, 플레하노프나 카우츠키에 대한 언급은 필요할 듯 하다. 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플레하노프(George Plekhanov)는 드 브리스의 돌연변이 이론을 수용하였고, 불연속적인 돌연변이를 혁명의 자연스러움을 확증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의 역사는 도약적으로 진보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하노프는 17세기 스피노자 또는 신라마르크주의에 의해 유행된 물질에 대한 물활론적인 성격(animistic character)의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편, 사회 다윈주의에 입각하여 맑스주의에 도달한 카우츠키(Karl Kautsky)도 드 브리스의 이론을 지지했다. 그가 보기에, 그 이론이 ‘자연이 변증법의 법칙을 따른다’는 함축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필연적인 사회 진화에 대해 생물학적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카우츠키는 다윈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긋지 않은 보기 드문 맑스주의자라 할 수 있다.
위에서처럼, 플레하노프와 카우츠키는 돌연변이 유전학이 맑스주의에 통합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반면, 레닌은 물리학의 인식론적인 문제들을 깊이 다루긴 했지만, 생물학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답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유전학에 대해 통일된 맑스주의적 관점은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1920년 전까지는 유전학과 신라마르크주의 사이에 명확한 쟁점이 그어진 적도 없었다.
조라브스키(David Joravsky)에 따르면, 유전과 진화의 문제에서 유전학과 신라마르크주의의 관점이 명백히 양립불가능함을 밝히면서 대규모의 생물학 논쟁을 촉발시킨 사람은 세레브로브스키(A. S. Serebrovskii)였다. 세레브로브스키는 모간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모간” 학교(Morganist school of Soviet Marxist biology)를 세운 과학자로서, 그가 촉발시킨 논쟁에는 50명에서 100명 정도의 러시아 생물학자와 물리학자가 그 논쟁에 참여했으며, 이는 맑스주의 대 비맑스주의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맑스주의 내부의 유전학 진영과 라마르크주의 진영의 대결이었다. 논쟁의 내용 또한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이었으며, 맑스와 엥겔스의 노선에 따라 입장을 정하려 한 참가자는 거의 없었다.
1929년까지는 모간 유전학 진영이 라마르크주의를 압도했으며, 모간 유전학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소비에트 생물학 내 맑스주의 노선에 따른 적확한 해석이라 믿었다. 그러나, 같은 해, 스탈린에 의해 “거대한 단절(the great break)”이 선포되었고, 생물학 논쟁은 어이없게 종결되어 버렸다. “과학의 볼세비키화”라는 명목 아래, 소모적인 논쟁 대신 과학적 진리 판별의 유일한 기준으로 ‘실천(practice)’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실천’이란 개념은 거의 ‘실용’에 가까운 듯하다. ‘사회주의 생물학’은 최우선 과제로 소비에트 인민을 이롭게 해야할 의무를 부여받게 되었고, 그동안 논쟁되어 온 생물학의 문제는 농업 산출력에 의해 판별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동안의 논의가 용해되어 버렸다. 그 유명한 리센코주의는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태동할 수 있었다.

맺음말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볼 때, 리센코주의가 맑스주의의 자동적인 귀결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쿨락(M. W. Mikulak)에 의하면, 맑스주의 내에 있던 라마르크주의의 잔재가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근거로 엥겔스 또는 티미리아제프의 라마르크주의적인 편향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다윈 또한 나이가 들수록 라마르크주의적인 편향에 물들어갔으며, 사회 다윈주의자인 스펜서와 같은 보수주의자들도 라마르크주의자였다. 그렇다면 리센코주의가 다윈주의의 영향도 받은 것인가? 사회 다윈주의의 영향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맑스주의는 하나의 공리적인 체계가 아니며, 그것을 주창한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의 다양한 입장들에 의해 구성된 체계이다. 그런데, 그것을 구성해가는 과정에서 대표적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입장 하나하나를 맑스주의에 포함시킬지 말지는 애매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엥겔스가 가졌던 라마르크주의적 편향을 맑스주의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아닌가? 이를 명쾌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엥겔스의 라마르크주의적 편향을 맑스주의에 포함시킨다면 리센코주의는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리센코주의는 맑스주의의 영향이라 할 수 없다. 만약 과학적 지식들을 사상시킨 순수한 형태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가지고 따져보면 문제는 좀더 간단해질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전학과 라마르크주의 중에 무엇을 지지하는가? 변증법적 유물론은 순수한 내용 상에서는 둘 중에 어느 것과도 정합적이기 때문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둘 중에 선택을 내릴 수가 없다.
리센코주의의 가장 큰 원인은 과학의 내용을 맑스주의 철학에 종속시키려 했던 1920년 말 당시 소비에트의 분위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센코주의는 맑스와 엥겔스가 가졌던 생각 하나하나를 교조화시키면서 그것에 과학의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끼워맞추려 했던 것과 실용주의적 노선이 덧붙여지면서 벌어진 헤프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따라서 리센코주의는 엥겔스의 영향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엥겔스의 책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맑스주의의 내용 또한 과학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해간다. 만약 20세기 초, 라마르크주의적 진화론이 맑스주의의 내용을 구성했다손 치더라도, 지금의 맑스주의에까지 라마르크주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자. 철학,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들은 과학활동에서 제거되어야만 하는가? 하물며 종교는? 물론 과학의 발전에 아무런 추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철학, 이데올로기도 있다고 본다. 기독교와 같은 종교의 경우, 과거에는 과학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과학에 전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맑스주의 철학과 이데올로기는 19세기부터 지금까지도 과학에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 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맑스주의자들은 진화론에서 ‘생존경쟁’이란 용어를 불편해했다. 그들은 ‘생존경쟁’이란 비유를 최대한 제거하려 노력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진화에서의 ‘협동’의 역할을 연구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항상 ‘생존경쟁’이란 용어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주장할 때, 유전자가 ‘비유적으로’ 이기적이란 것이지, 개체가 필연적으로 이기적이 된다는 뜻이 아니란 점은 중요하다. 한편,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은 생물계의 협동이 경쟁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맑스주의자들은 생물계의 진화론이 인간사회의 역사에까지 직접 적용하는 것을 꺼려했다. 왜냐하면, 진화론의 직접적인 적용은 자유방임적 경제체제를 정당화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인간 본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날 보기에도, 인간의 역사에 생물학적 진화론을 직접 적용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유전자의 변이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의 역사를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인간의 역사를 생물학적 진화에 의한 변화로 보기에는, 인간의 역사는 너무 짧은 반면 변화의 폭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유전자의 작용 외에도 의식적인 작용에 훨씬 더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 물론 역사변화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맑스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이 본래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식의 생물학적 결정론을 매우 불편해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자유롭고 협동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이기적 본성은 큰 장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기적 본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라고 생각했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킴과 동시에 인간의 본성도 함께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맑스주의자들의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테제는 이를 잘 말해준다. 20세기 들어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은 무척이나 격렬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인간 본성은 생물학적 결정론과 환경 결정론 사이에서 환경 결정론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었다가, 지금은 둘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 논의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철학과 이데올기는 세계에 대한 직관을 제공해주며, 과학자들은 그러한 직관을 바탕으로 과학활동에 임하게 된다. 그 직관이 때로는 증명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한다. 그러한 직관이 과학에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한 철학과 이데올로기는 유의미하다. 언젠가 그 철학과 이데올로기의 생명력이 다할 수는 있을지라도.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흄의 논의를 그대로 이어 과학과 정치적 지향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영은 그러한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과학에는 언제나 도덕, 정치적 관념이 심어져(imbedded) 있으며,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상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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