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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통론2] 원자 폭탄

hs_041123.hwp 과학사 통론 II 12주차 요약문>
원자 폭탄(Atomic Bomb)

날짜 : 2004. 11. 22  | 이름 :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Feynman’s recollection in Feynman, Richard P. “Los Alamos from Below,” in Lawrence Badash et al.. eds.. Reminisciences of Las Alamos, 1943-1945 (Boston: D. Reidel, 1980), pp. 105-132

밥 윌슨의 제안으로 프로젝트에 참여.
로스 알라모스의 준비기간 동안 시카고에서 폭탄에 관해 필요한 정보 알아왔음.
은밀히 로스 알라모스로 이동. (파인만은 그냥 주의 안하고 감)
도착해보니 아직 집, 기숙사, 실험실조차 완전히 준비 안되어 있었음.
그래도 이론물리학들은 곧바로 일을 할 수 있었음. 매일같이 연구하고 책을 읽었음. 매우 열광적인 시기였음.
한스 베테의 말상대가 되어줌으로써(그의 말에 반박해주었는데 그거이 마침 그에게 필요한 것이었음) 점수를 따고 베테 밑에서 네 명의 사람을 거느린 그룹 책임자가 되었음.
기숙사 완공. 2인 1실이었는데, 혼자 살고 싶어서 아내의 잠옷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못들어오게 했음. 이것 때문에(그때는 몰랐지만) ‘남자기숙사에 여자가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이 생겼고, 평의회의 대표로 선출됨. (상층부까지의 보고 및 아래까지의 명령)
검열 문제. 아버지와 아내의 편지에서 암호. 암호는 안된다는 규칙 생김. 검열당국과 신경전(게임) 벌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것이 통과되고 어떤 것이 통과될 수 없는지 정확히 알게 됨. 이런 경험을 토대로 다른 사람과 내기를 해서 돈을 따기도 함.
개구멍 생김. 정문으로 나가서 개구멍으로 들어오는 식의 행동 반복. 구멍이 있다고 설명. 구멍에 대한 편지 통과시킴.
케메니의 출신성분을 두고 엄하게 심문했던 일에 대한 편지 통과시킴.
파인만은 언제나 문제를 직접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지적하려고 애썼다. 문서보관의 문제. 문서를 꺼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문제 지적했음. 번호로 된 자물쇠 열기 시도. 간단한 번호 및 그 사람의 취향을 토대로 모든 사람들의 자물쇠 열었음.
자연 우라늄으로부터 우라늄235를 분리해내고 측정하기. 에밀 세그레가 측정방법을 보내도 실패. 직접 가봐야 했음. 서로서로 오가는 정보 아무것도 없음. 군인들 아무것도 모르고 안전에 대해 전혀 주의 기울이지 않음.
오펜하이머가 세그레에게 “공장 전체를 주의깊게 조사해 보시오. … 그동안, 우리는 그곳에 폭발이 일어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양의 물질이 한 곳에 모여 있을 수 있는지 계산해 보겠소” 두 개의 그룹 활동. 크리스티의 그룹은 용액으로된 물질에 관해 연구. 나의 그룹은 상자 속의 마른 가루로 된 물질에 관해 연구. 우리는 그들이 얼마 만큼의 물질을 한 곳에 안전하게 축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계산을 했다.
오크리찌의 공장상황 살피러 갔음. 너무 많은 상자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음. 해결책. 물 속의 중성자들을 흡수하기 우해 용액에 카드뮴을 집어 넣고, 그리고 어떤 법칙에 따라 상자들이 너무 밀집해 있지 않도록 분리시키면 됨. 그곳의 장군들과 기술자들에게 설명했음. 상세한 것 알리지 말고, 수칙만 말해달라고 했지만, 파인만은 ‘이해를 해야 규칙을 따를 수 있고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로스 알라모스에서는 오크리찌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단 말입니다!’고 말함으로써, 대단한 효과 발휘.
공장 다시 설계. 한 개의 밸브가 막히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어디서나 적어도 두 개의 밸브 필요했다. 그런데 파인만은 청사진을 볼 줄 모름. 대충 해결.
계산기(컴퓨터)의 문제. 고장 잦음. 모든 계산기 고칠 수 있게 됨. 폭탄의 내파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는 지를 정확히 알아내야만 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방출되는지 등등을 정확히 알아내야 함. 많은 계산 요함. 프랭켈이 IBM 기계로 계산 가능하다는 것 깨닫고, IBM에 기계 주문. 스탠리 프랭켈, 나, 다른 한 사람이 기계 조립. 수리공 도와 완성.
프랭켈, 컴퓨터 병으로 고통. 파인만, IBM 그룹으로 옮겨가라는 명령 받음. (계산)
IBM 기계를 움직이는 어린 기술부대. 군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려 하지 않음. 파인만은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 강연. 그들은 모두 흥분해서 “우린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겠다!”라고 소리 지름. 그 후 그들은 작업방법 개선시켰고 밤에도 일함. (목표와 내용을 알아야 최선) 일의 진척속도 엄청 빨라짐. 한달에 두 세 개씩 문제 해결.
원폭실험 직전.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방출될 것인가?” 힘든 계산. 한달 안에?
아내 결핵. 기숙사의 친구에게 차를 빌리기로 약속. 크라우스 퍼크. 그는 스파이였고 로스 알라모스에서 산타페까지 원자 비밀을 가지고 가는데 자동차를 사용해왔다. 긴급한 일 닥치고 퍼크의 차를 빌려 알버커키로 향함. 겨우 도착했지만, 아내는 몇시간만에 죽음. 시계 멈춤. 과학적 설명. 무척 우울해지지는 않음.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 수개월이 지나서야 울었다.

처음에 말단에 있던 파인만, 후에 그룹 책임자가 됨. 그리고 몇 명의 위대한 사람들 만남.
페르미. 계산과 설명.
폰 노이만. 사회적 (적극적) 무책임감 키움.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줌.
보어. 보어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파인만을 높게 평가. 파인만은 자신이 어떤 사람과 말하는 중인지 통 알지 못했다. 물리학 자체에 관한 걱정 속에서 직설적으로 말할 뿐. 그런 식.. 훌륭하고 유쾌한 일. 행운이다.
원폭실험. 실제로(맨눈으로)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다.
은도금이 된 공. 그것은 플루토늄. 지구상엔 존재하지 않았었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가치있는 것이다.
원폭실험 성공. 밥 윌슨 침울해 함. “우리가 지독한 일을 저질렀어요.”
알다시피 내게 일어났던 일은 ‘좋은 이유’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달성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바로 즐거움이요, 흥분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멈추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밥 윌슨이야말로 그때까지 그 일에 대해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옴.

Joseph J. Ermenc ad.. Atomic Bomb Scientist: Memoirs, 1939-1945, Interviews with Werner Karl Heisenberg, Paul Hartech, Lew Kowarski, Leslie R. Groves, Aristid von Grosse, C.E. Larson, (Westport: Meckler, 1989), pp. 1-75 (Heisenberg)

하이젠베르크 : 핵분열 시 중성자 나오면서, 연쇄반응 가능하다. 이를 통해 폭발 얻을 수 있다.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나,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 아무도 몰랐다. 실제로는 모두들(페르미 등과의 토론에서) 회의적이었다. 분열 당 튀어나오는 중성자의 평균이 1보다 크다면 연쇄 반응 만들 수 있다.
39년 플루게의 논문에 다수 흥미가졌고, 독일 국방부에서 그에 관심을 가지고 핵분열 연구 결정했음. 나는 39년 라이프찌히에 돌아왔고 군당국으로부터 우라늄 연구팀에 합류할 것을 지시받았다. 우리의 임무는 우라늄이 폭발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기술자와 물리학자 사이의 갈등? 추상적 물리학(유대 과학)에 대한 적대감 또는 무시 있었음. 그러나 기술자는 전체를 볼 수 없고, 핵분열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 내가 우라늄 프로젝트의 책임자라는 것은 과장. 이론가로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난 프로젝트의 책임자도 아니며, 아무런 공식적 책임도 없었다. 난 이론물리학자일 뿐.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제안만 할 수 있을 뿐.
나는 페이퍼에서, 다른 이들의 연구논문이 옳다면 연쇄반응을 얻을 수 있고, 원자로를 지을 수 있으며, 순수한 우라늄-235을 얻거나 원자로를 작동시켜 그와 비슷한 물질(반년 지난후 알게된 바로는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면 폭발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원자로 배치에 대한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 팀은 실험물리학자가 주도했다. 여러 그룹들이 가벼운 경쟁을 하긴 했지만 심한 불화, 불일치는 없었다.

돈문제 : 전쟁 전엔 열악했지만, 전쟁 중에는 풍족해졌음.
라이프찌히 그룹의 되플(Dopel) 부부와 연쇄반응 실험 성공(L-4 : 중수 속에서 우라늄 화염.. 뜨거워지다 폭발). 흥분.
당시 물리학자들의 심리적 상황 : 처음으로 재정지원을 받으며 연구 수행. 그 상황을 계속 이용하고 싶었다. 정부는 우리를 전쟁에 이용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물리학을 위해 전쟁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만드려면 오래 걸릴 것(5년 또는 그 이상)이라 예상했고, 그 전에 전쟁은 끝날 거라 예상했다. 그러한 상황 인식에서 우리는 그 방향(폭탄개발)으로 진지한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다. 39년 12월 실용화 계획안을 작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너무 오래 걸린다고 하면 지원이 소홀해질 것이라 예상. 조심스럽지만 만들 수 있다고 함. 우리는 전력발전용 우라늄 원자로를 개발하려 했고, 이는 전후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도 우리와 마찬가지 인식일 것이라 예상했다. “나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며, 독일이 질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전후에 관심이 있었다.” 반면, 당신들(미국)은 빨리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당신들도 45년에야 만든 거 아닌가..) 우리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방향은 피했다. 우리는 단지 연구용 돈이 필요했을 뿐. 누군가 “이제 원자폭탄을 만듭시다”라고 할까봐 두려웠다. 단, 연구의 책임권한을 다른 그룹(특히 Deibner)에게 뺏기지 않도록 조심하긴 했다. 그들을 의심하고 조심하면서 그들과 협동했다. 미국 프로젝트와의 차이는 원자폭탄의 개발가능성 및 기간을 다르게 보았다는 것 외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군 당국은 핵보다는 로켓에 더 지원.
Irving의 저술 : 사실은 맞지만, 정신은 틀렸다. 그는 우리의 심리상태를 잘못 파악. 전쟁 중, 그는 우리가 전쟁승리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라 추론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원자로 개발에 흥분했지만 그 이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전쟁 또는 원자폭탄과 관련짓지 않았다. 독일에는 진정 원자폭탄에 관한 것이라고 부를만한 프로젝트가 없었다.
바이스재커의 아버지 : 레지스탕스. 보어의 안전 도모해 줌. 보어가 미국으로 간 이후, 조사받았음.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복잡하다. 기술, 과학 함께 발전했다. 나는 기술(무기)발전에 의해 정치적 단위 커질 것이라 예상.

결국, 하이젠베르크는 전쟁중의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상황논리일 수 있으나, 그는 원자로 연구에 매진했으며, 절대 원자폭탄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또는 그에 관심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가 개발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면? 그땐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될 것 같다.

Los Alamos Laboratory 50th Anniversary atricles(#1-#24) [http://www.lanl.gov/worldview/welcome/history.html]

맨하탄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폭탄개발 완료 시점까지의 상세한 서술.
로스 알라모스의 실험실은 2차 세계 대전 중반에 설립. 과학적 무기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으며, 전쟁 이전 또는 중에 유럽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이민해 온 것이 기반이 될 수 있었음. 그들은 사이클로트론이나 입자 가속기 등에 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원자폭탄 개발의 핵심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2년 여름, 오펜하이머가 이론 물리학자 여름 학회 개최. 원자폭탄 개발 논의 시작.
그 이후, 오펜하이머와 존 메리는 여러 지역에 산개해있는 연구들 관리. 그러나 보안의 어려움 때문에 한 곳에 집적시키기로 함.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로스 알라모스 실험실.
핵무기 프로젝트의 감독에 Gloves 장군 임명. 프로젝트 명칭 ‘The Manhattan District’로 개명. 대규모 실험실 짓기로 결정. 독단적이긴 했지만, 효과적이었음. 과학자인 오펜하이머와 함께 계획 입안. 지리적 조건을 조사하여 결국 로스 알라모스 결정.
최초로 연쇄반응을 보였던(증명은 다른 사람이 했음) 엔리코 페르미가 미국으로 이민. 연쇄반응 이론은 원자폭탄의 원리이기도 하면서, 플루토늄 생산의 원리이기도 함. 따라서 그는 프로젝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
Ranch School을 주거공간으로 사용. 또한 많은 건물들 지음.
Groves는 과학자들에게 제복을 입히는 등 군사적인 성격 강조. (시간이 지나면 약간 옅어짐. 예를 들어 Military Laboratory는 후에 academic outpost로 바뀜)
짧은 시간 내에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하는 임무. 고용된 과학자와 기술자의 수 증가. 군사적인 시스템으로 굴러감.
보안상 bomb 대신 gadget라는 용어를 사용.
1943년 봄. 첫 번째 핵무기의 연구를 시작. 관리 위원회 구성.
핵무기 제작에 Gun type 도입. 핵물질을 임계질량 이하의 두 개로 나눈 다음 빠른 속도로 서로 충돌시켜 임계질량을 초과하게 만들어 기폭시키는 방식.
우라늄-235 vs 플루토늄
1943년 7월. 첫 번째 플루토늄이 로스 알라모스에 도착.
계산기(컴퓨터)의 도입. 엄청난 양의 계산이 필요했기 때문. (전쟁 상황이 계산기 발명에 영향 주었을 것)
1943년 10월, Special Engineering Detachment(SED) 조직. (파인만 글에 있었던 부대) 군대에 징병된 고급인력 활용책이었으며, 로스 알라모스의 인원이 부족하기도 했기 때문.
우라늄-235 vs 플루토늄-240 => Trinity(플루토늄) 테스트 성공.

S.S. Schweber, “The Empiricist Temper Regnant: Theoretical Physics in the United States, 1920-1950,” HSPS 17(1) (1986), pp. 55-98

1920년대부터 미국의 물리학은 변화하기 시작. 20년대부터 이론 물리학이 서서히 성장해가긴 하지만, 그것이 독자적인 분야로 정립하기보다는 실험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상호발전하게 되었다고 함. 당시 이론물리학이 발전하게 된 이유로는 물질 이론이 정교화해감에 따라 이론물리학자들의 유용성이 인정되면서 그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점과 유럽에서 물리학자들이 대거 망명해온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경험주의적, 실용주의적인 철학, 대학의 학부제도, 그리고 당시의 전쟁 상황은 이론 물리학을 실험 및 실용성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발전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으로, 이론 물리학은 순수학문으로 인정받는 한편, 미국 물리학에서 이론과 실험간의 긴밀한 협동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다.

1. 철학적 개요
실용성! [철학, 이론 -> 실험] 보다는 [실험 -> 철학, 이론 적용]
문화적 요인 있을 것. 사회적 부의 창출에 대한 요구. (역사적으로도 이론보다는 실험이 발달).
조작주의. 관측결과가 ‘의미’에 영향. -> 오펜하이머에 영향
설명(explanation)보다 기술(description) 강조. (특히 빛의 이중성에 대해)
이론의 철학적 해석보다는 현상에 대한 설명(기술)과 예측에서의 유용성 강조 (특히 양자역학에서)

2. 제도적 요인
대학 내에 이론분야와 실험분야가 한 학부에 함께 속해있음.
이론 물리학자도 실험 관심. 실험 물리학자도 이론의 중요성 인식 -> 유럽의 학자들 초청 강연. 이론과 실험을 배우는 학생들 유럽으로 유학 과정 이수.

3. 30년대
30년대 물리학 성장 두드러짐.
30년대 초, 이론 물리학자들이 대학에 정착. 대학원생 꾸준히 양성. 이론 물리학도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섬. (예: 미시건 대학의 이론 물리 심포지엄 개최) 한편, 유럽의 물리학자들 미국으로 대거 망명해옴. 그러나 그들은 미국의 분위기를 바꾸기보다는 그 분위기에 동화해감.
한편, 핵물리학의 발전은 이론과 실험의 관계가 매우 밀접해지는 계기가 되었음.

4. 오펜하이머와 그의 학파
오펜하이머는 원래 이론 물리학자. 그러나 실험 물리학과의 협동 연구의 중요성 간파. 특히 전쟁 기간 중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이론과 실험을 조화시키는 방법 완전히 체득. 이러한 오펜하이머 지도 아래 많은 대학원생 양성됨. 이론과 실험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자리를 잡게 됨.
이러한 사례는 20-50년대 미국 물리학의 변화를 대표하는 사례라 할 수 있음.

5. 전쟁과 전쟁 이후의 기간
전쟁이 대학의 연구 형태에 큰 영향을 미침.
연구의 대형화 (로렌스 실험실 등)
이론 물리학자들에 대한 존경 -> 이론 물리학이 순수 학문으로서 인정. (파인만의 QED)
한편, 이론 물리학자들은 실험과의 협동 강조했으며, 전시의 이론과 실험의 긴밀한 협동은 전후 미국에서 자리를 잡음.

Mark Walker, “National Socialism and German Physics,”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24 (1989), 63-89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는 독일 물리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보통 국가 사회주의로 인해 독일 물리학이 쇠퇴했다는 평가 또는 독일 물리학이 국가 사회주의에 복무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어떠했는가?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레나르드, 슈타르크 등이 이론물리학을 유대 물리학이라며 비난하였고, 실질적으로 대다수 물리학자들이 정치적으로 난처한 처지(유대인이 아닌 하이젠베르크에게까지 White Jewish라는 비난)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이젠베르크 등의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한편, 정부와 군당국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실제로 정부와 군 당국은 이론 물리학에 대한 반감이 있긴 했지만, 그것의 실질적인 필요성(무기 제작 등)을 인정했으며 그들을 전쟁에 이용하고자 했다. 한편, 물리학자들도 계속 다투기 보다는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연구 지원 등)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결국 그 둘의 상호 협력하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정치적으로 난처한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 프랜텔 등은 국가와 타협을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카이저-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이 되고, 프랜텔은 공군과 접촉하여 물리 교육과 군사에 있어 물리학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이들은 각종 공식 석상 및 각종 문헌에서 전쟁에서의 이론물리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정부도 그들의 필요성 인식하고, 그들의 연구(특히 핵분열 연구)를 대폭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국가사회주의자로 옹호되기까지 한다.(오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결국, 레나르드와 슈타르크의 추종자들을 패배시키기 위해 하이젠베르크, 프랜텔 등은 국가 사회주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옹호하고 정당화한 것이며, 결국 그들은 승리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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