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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코징, 철학의 근본 문제

fns_1.hwpfns_2.hwp ‘세계요소’, ‘직접적 소여’ 등과 같은 소위 중립적인 근본 개념을 도입하여 철학의 근본물음을 회피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유물론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대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레닌의 확신에 따르며, “‘직접적 소여’, ‘사실적 소여’ 등은, 마흐주의자와 내재 철학자 및 그 밖의 철학적 반동주의자(-_-)들이 빠진 혼동의 결과며, 또한 불가지론자가 (때로는 마흐와 같은 관념론자까지도) 유물론자로 위장되는 가장 무도회다.” 철학의 근본 물음을 회피하고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회될 수 없는 대립을 은폐하는 방법들은, 그 이후에 슐뤽크와 카르납이 주축이 된 빈 학파의 신실증주의에 의하여 훨씬 더 교묘하게 응용되었다. 신실증주의는, 소위 검증이론을 근거로 하여, 철학의 근본물음을 무의미한 거짓 물음으로 간주하였다. 비록 현대의 신실증주의가 취하는 견해들은 다양한 관점에 따라 변화되기는 하였지만, 현대의 신실증주의는,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논쟁이 이론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점을 여전히 확고하게 고수한다. 이러한 점에 관하여 카르납은 1963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일정한 실체들의 실재성이나 비합리성에 관한 존재론적 테제를 사이비 테제로 간주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존재론적 테제를 일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명제나 결정들로 대체한다.” … 그러나 이미 레닌은 그러한 시도를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철학적 노선을 술어를 통하여 변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히 유치한 장난이다.”

레닌의 말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식론의 근본 물음을 실천으로부터 고립시켜 해결하려는 시도를, ‘스콜라 철학’이나 ‘철학적으로 고루한 생각’이라고 표현하였다.”

물질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외부에 존재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원인이며 자기 자신을 통하여 존재한다. 이에 비하여 의식은 물질의 발전 산물이며, 따라서 물질에 대해 의존적이며 자기 자신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식은 결코 자연 산물이 아니며 또한 자연적 속성도 아니다. 오히려 의식은 사회적 실천을 매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실천은 바로 인간 사회의 물질적 존재 방식이며 또한 물질의 최고 운동 형식의 물질적 존재 방식이다. 인간의 사회가 성립하면서, 인간의 사회는 실천과 의식을 매개로 하여, 실천과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을 이론적·실천적으로 획득하고 또한 그것을 변혁하여 그것을 인간의 목적에 따라 알맞게 변형시킬 능력을 획득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역사적·대상적 활동을 통하여 물질을 자연의 형태로 변혁할 뿐만 아니라 물질을 인간의 물질적·사회적 관계의 형태로 변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의 힘, 능력, 지식 등을 전개시켜 자신의 의식까지도 변혁함으로써 자기 자신까지도 스스로 변혁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물질, 의식, 실천 등의 변증법적 상호 관계는 객관적으로 발전된다.

(홀바하의 기계적 유물론에 대해..) 이러한 유물론은, 물질이 그 운동과 발전에서 질적으로 상이한 물질의 형식들을 산출하며, 또한 이 형식들이 그때그때마다 질적으로 특수한 합법칙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또한 이 유물론은, 인간의 사회가 물질의 최고 발전 형식을 형성한다는 견해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은 사회 및 사회의 질적으로 특수한 존재 방식, 그리고 인간의 실천적·대상적 활동 들을 고찰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인간을 자연 존재로 설명하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을 개별적 자연 존재로 해석하는 것은 그와 동시에 일정한 사회적 토대를 지니고 있다. 즉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론자들에게는 자유 경쟁 사회의 고립된 개인이 ‘자연에 부합하는 개인’으로 생각되었음에 틀림없었다.
부르주아적 유물론은 아직까지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 의식의 사회적 성격은 좀더 은폐된 채 남아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부르주아적 유물론은 의식을 오로지 자연적 속성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자연적 속성은 인간 육체의 구조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 따라서 인간 의식이 생성하고 발전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물질적 토대인 사회적 실천이, 즉 무엇보다도 인간의 노동이 설명되지 않은 채 나아 있게 되었다. 의식을 자연적 속성으로 파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 의식의 변화 그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이해될 수 없었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의 발전 산물로서 생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성은 단지 자연적인 조건들에만 의거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노동, 즉 포괄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전체적인 사회적 실천, 따라서 사회적 조건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낡은 유물론은 실재를 단지 객관의 형식으로만 파악하였지, 그것을 주관적으로, 즉 인간의 실천적 활동으로 파악하지는 못하였다.

의식을 인간의 실천적 활동으로부터 분리시킬 경우, 의식은 단지 물질적 실재에 관한 수동적인 반성으로 간주되며 의식의 기능은 관조적인 반영에 한정된다. 그러나 물질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서는, 실재를 변형시키는 능동적 역할이 실천과 결합되어 있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의 형식인 의식에 귀속된다.

과학적 설명의 원리인 기계적 유물론은 모든 사건들을 기계적 운동으로 소급시켰기 때문에, 실재를 획득하고 재생산하는 관념적 형식인 의식의 특수한 성질을 뚜렷이 밝혀낼 수 없었다. 기계적 유물론은 모든 의식 과정들을 감각으로 소급시켰으며, 감각적 경험에 대조되는 이론적 사유의 질적인 특수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철학은 인간과 실재의 이론적 관계를 반성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 활동의 규정적 영역인 사회적 실천 전체를 철학적으로 반성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 대한 레닌의 정식화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측면으르 지니지 못한 유물론을 불충분하며 편파적이며 죽어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고쳐 말하며, “삶과 실천이라는 관점이 인식론의 근본적인 첫 번째 관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불가피하게 유물론으로 귀결된다.”

변증법적·사적 유물론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근본적인 실천적 문젯거리이며 그것도 세가지 관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물질과 의식이 관계라는 문제는 사회의 실천적 삶의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이 문제는 실천이 포함되는 경우에만 이론적으로 파악되고 해결될 수 있다. 셋째, 이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와 사유의 근본적인 방향을 정립하게 되므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실천적·이론적 활동에 대하여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철학의 근본 물음에 대하여 우선은 ‘순수한 형식’으로, 즉 사회 및 사회적 실천과는 무관하게 답변하고 나서 그 대답을 사회에 적용시키자는 요구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실천과의 연관은 결코 배제될 수 없다. … 그와 같은 시도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존재론적 견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존재론적 견해에 따르면, 물질과 의식 그 자체는 사회적 실천 및 사회적 인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존재론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사회적 실천을 토대로 해서만 성립하고 발전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확증은 (앞서 말한) 존재론적 입장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로 나타나며, 인간학주의로의 경향으로 나타나며, 또한 유물론을 말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어떻게 물질과 의식의 관계가 이처럼 강조되는가? 이때 인간은 무엇을 야기하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그의 실천적 활동과 생산활동과 사회 정치적 활동과 계급 투쟁 등에서, 자연 대상, 사회적 관계, 이념, 사상, 계획들 중 무엇이 규정적이며 근본적이며 최우선적인가 하는 문제와 끊임없이 대결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은, 노동 과정에서 획득된 자연대상이 그의 의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물질적으로 존재하며 또한 물질적·사회적 관계가 사유와 욕구에 의하여 결코 전복될 수 없다는 실천적 경험을 얻게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자신의 역사적 실천과 인식에 의하여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을 파악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실천적 활동을 통하여 사유가 노동과정과 사회적 생산 활동과 사회의 전체적 삶에서 얼마나 커다란 역할으르 담당하는가를 경험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론은 실재적인 전제로부터 출발되어야지 사변으로부터 출발되어서는 안된다.

첫 번째 전제는 자연적 조건들을 토대로 하여 삶을 영위하는 개인들의 실존이다. 개인들은 물질적·사회적 관계 내에 있는 자신들의 욕구를, 자연을 변형시키는 생산적 노동을 매개로 하여 만족시킨다. 그리고 “근원적·역사적 관계들의 네 가지 계기들, 즉 네 가지 측면들이 이미 고찰되고 난 연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원래부터 ‘순수’ 의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 ‘정신’은 물질에 부착되어 있는 저주 그 자체를 지니고 있으며, 이 저주는 피운동적 기층과 목소리의 형식으로, 즉 간단히 말하자면 언어의 형식으로 등장한다. 언어는 의식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언어는 실천적 의식이다. 언어는 다른 사람들과 또한 바로 나 자신을 위해 비로소 존재하는 실재적인 의식이다. 언어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자 하는 욕구와 필요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 그러므로 의식은 원래부터 이미 사회적 생산물이며, 여하튼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 존재하게 된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지적에 따르면, 의식은 실천적·대상적 활동을 토대로 하여 발전하며, 우선은 물질적 삶의 과정 안에 거의 완전하게 포함된다. 물질 노동과 정신 노동이 분화된 이후에야 비로소, “의식은 존속하는 실천 의식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실제로 상상할 수 있으며, 또한 실재적인 것을 표상하지 않고서도 어떤 것을 실제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순간부터 의식은 세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신학·철학·도덕 등과 같은 ‘순수’ 이론을 형성할 단계로 이행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설명한다. 즉, 첫째, 사회적 삶의 과정에서 의식은 어떻게 그것의 물질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되어 그것에 대하여 상대적 독립성을 갖게 되었으며, 의식과 물질적 실재의 대립은 어떻게 이론적으로 성취되었는가? 둘째, 무엇에 의하여 철학의 근본 물음과,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철학의 근본 방향들이 발생할 사회적·이론적 전제가 성립하게 되었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와 사회의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이러한 연관들을 드디어 과학적으로 파악하며 정초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철학의 근본 물음은 외관상 지니고 있던 선험적인 성격을 떼어 내게 되었는데, 이 선험적인 성격은 철학의 근본 물음에 관한 비역사적 견해와 관련되어 있었다.

(모든 사물과 모든 과정, 모든 관계 등을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으로 구분하려는 시도에 대해) 실제로 ‘순수’의식이나 ‘순수’ 관념적 현상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언제나 물질 및 물질적 사건 등과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철학의 근본 물음에 관한 존재론적 견해는 두 가지의 상이한 실재들을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론적 견해는 불가피하게, 과학이 순수 관념적인 현상인가를 묻는 따위의 전혀 무용한 논쟁에 이르고 만다. 현대 과학은 물질적으로 존재하기도 하며 또한 관념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둘 중 하나에 반드시 귀속시키려고 하는 존재론적) 접근의 잘못을 인식하기 위하여는 『자본론』에서 이루어진 인간 노동 과정에 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레닌은 물질 개념을 ‘객관적 실재르르 표현하는 철학적 범주’로 정의하였는데, “이 객관적 실재는 인간의 감각에 주어지고 또한 감각에 의하여 묘사되며, 그러면서도 감각으로부터는 독립적으로 조재하는 것이다.” 또한 레닌은 더 나아가, “… 철학적 유물론이 승인하는 물질의 유일한 ‘속성’은 우리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는 점”을 명확히 확정지었다.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는 어떻게 보다 자세하게 규정될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살펴보면, 철학의 근본 물음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첫 번째 측면은 일차적인 것에 관한 물음이며, 두 번째 측면은 의식이 물질을 인식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묻는 물음이다. 종종 이 근본 물음의 첫 번째 측면은 존재론적 물음으로 표현되며, 두 번째 측면은 인식론적 물음으로 표현된다. … 그러나 나는 (이것이) 철학의 근본물음을 위와 같이 두 가지의 측면으로 나누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 존재론적 물음과 인식론적 물음이 분할되어 이끌어질 수 없다. 우리는 … 그것을 통일성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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