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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통론2] 다윈과 다윈주의: 9주차 요약문

hs_041102_97.hwp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1859): Introduction, ch. 3-4, Conclusion

머리말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던 중 남아메리카에 서식하고 있는 생물들의 분포와 그 대륙의 현재와 과거 생물 사이의 지질학적 관계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와 관계 있는 온갖 사실들을 수집하고 그에 대해 생각한 결과 ‘종의 기원’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5년간의 작업 끝에 몇 개의 짧은 논문들을 작성했다. 1884년에 이를 확장하여 몇가지 결론들의 개요를 작성했고, 지금까지 계속 연구해왔다.
이제(1859) 나의 연구는 거의 끝이 났다. 완성까지는 몇 해가 걸리겠지만, 건강 상 발표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월러스가 자신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기에 서두르게 되었다. 지금의 요약은 불완전하며 지금까지의 결론과 예시, 참고문헌들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박물학자로서 종들이 독립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변종처럼 다른 종들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생각은 있을 법 하지만, 생물 사이의 상호적응, 환경에의 적응 및 변화는 엄청나게 복잡하기에 이에 따른 근거를 충분히 보일 수 없는 한 그 결론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쉽게 시작하기 위해 가축과 재배식물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첫 장에서 사육 하에서 생기는 변이를 논하면서 연속적인 변이 누적의 위대한 능력을 보일 것이다. 다음으로 자연상태 종들의 변이성을 살피고, 생존경쟁 하에서 ‘자연적으로 선택’됨을 보일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복잡한 변이의 법칙 논의하고 다음 다섯 장들에서 난점 제시할 것이고, 생물들의 시간에 따른 지질학적 계승과 공간을 통한 지리적 분포를 고찰하겠다.
아직 모호한 점이 남아있지만, 각 종이 독립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오류라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을 가질 수 없다. 종은 불변하지 않으며, 같은 속에 속하는 종들은 다른 어떤, 일반적으로 절멸된 종들의 직계 자손들임을 확신한다. 또한 자연선택이 변화의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방법임을 확신한다.

3장 생존경쟁
생존경쟁 때문에, 한 변이가 한 종의 개체들에 대해 다른 조건들과의 무한히 복잡한 관계 중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것이라면, 그것을 그러한 개체를 보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일반적으로 그 자손들에게 유전될 것이며, 그 자손들도 살아남을 확률이 더 커질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자연선택이란 용어로 불렀다. 스펜서의 최적자 생존이 보다 정확하며, 때로는 이것이 똑같이 편리하다.
인위적인 선택과 같이, 자연 또한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알고 보면 자연은 혹독한 생존경쟁의 장이다. 생존경쟁은 모든 생물들이 높은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으로부터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모든 생물들은 조금만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면 즉각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크게 증가한다. 그러나 각 종의 자연적 증가를 방해하는 원인들 ― 천적, 먹이, 기후(절대/상대), 공간, 기생) ― 은 무수히 많고, 이에 의해 각 종들은 그 평균수가 유지된다.
생존경쟁 하에서 생물들 사이의 관계는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그물망을 이루며, 작은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전체에 큰 변화가 야기될 수 있다. 한편, 같은 속의 종 사이에, 또는 같은 종의 개체들과 변종들 사이에 생존경쟁이 가장 격렬하다. 모든 생물의 구조는 그 생물이 경쟁하게 되는, 그것이 피해야 하는, 혹은 그것이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다른 모든 생물들의 구조와 근본적인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4장 자연선택 : 적자생존
생존경쟁이 변이에 대해서 작용하는 원리. 유리한 개체의 차이와 변이를 보존하고 해로운 것을 파괴하는 것을 나는 자연선택 혹은 최적자 생존이라고 불렀다. (단 유용하지도 해롭지도 않는 변이들은 선택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각 생물은 그 생활조건 하에서 개량되며, 대부분의 경우 체제상의 진보라 일컬어질 만한 결과로 유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하등의 형태들은 그들의 단순한 생활조건에 작 적응되어 있으면 오랫동안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자연선택은 또한 형질의 분기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생물들이 구조, 습성 및 체질에서 분기하면 할수록 그만큼 같은 지역에서 지탱될 수 있는 수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같은 종의 변종들을 구별짓는 조그만 차이가 꾸준히 증가하여 마침내 같은 속 혹은 다른 속들의 종들 사이의 보다 큰 차이와 같아지는 경향이 있다. 모든 동식물이 연관되어 있는 방식은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변종 – 종 –  속 – 아과 – 과 – 목, 아강 – 강 순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떤 강에서의 몇가지 집단은 일정한 간격으로 한 줄로 늘어놓을 수 없으며, 그 대신 점들 주위에 뭉쳐 있으며, 이 덩어리들은 다시 다른 점들 주위에 뭉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만일 종들이 독립적으로 창조되었다면 이런 종류의 분류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연관은 유전, 변이와 함께 절멸, 형질의 분기를 일으키는 자연선택의 복잡한 작용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연관관계는 나무(계통수)로 정확히 비유될 수 있다.

15장 결론
지금까지 종들이 오랜 계승의 과정 중에 변화되었음을 여러 사례들과 함께 제시하였다. 이것은 수많은 경미하지만 유용한 변이들에 대한 자연선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종교적 감정에 충격을 줄 하등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인간의 위대한 발견인 중력의 법칙 또한 라이프니츠에 의해 ‘종교를 전복하는 것’으로 공격되었음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다만 최근까지 박물학자와 지질학자들이 종의 변화를 믿지 않았는가? 세계의 역사가 짧은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때는 종은 변화할 수 없는 산물이라는 믿음이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질학의 발견들로부터 이제 시간에 대한 어느정도의 관념을 얻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를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거리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백만년이란 말의 뜻도 충분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며, 거의 무한한 수의 세대 중에 누적된 많은 작은 변이들을 합쳐서 그들의 완전한 효과를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책의 견해들의 진실성을 확신하지만, 정반대의 견지에서 숙련된 박물학자를 확신시킬 것으로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 융통성이 있는 머리를 가졌으며, 이미 종의 불변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몇몇 박물학자들은 이 책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특히 미래에, 즉 이 문제의 양쪽을 편견 없이 볼 수 있는 젊은 신진 박물학자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생물의 기적적인 창조에 관한 온갖 질문들에 창조론자들은 제대로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반응은 예상되었던 일이다. 과거에 진화의 문제에 관해 많은 박물학자들에게 이야기해 보았으나 한번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변해 거의 모든 박물학자들이 진화의 대원리를 인정하고 있다.
종이 변화한다는 학설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변화를 수반하는 계승의 이론이 같은 큰 강 혹은 계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나는 동물들이 적어도 많아야 너댓 조상들로부터 생겨났으며, 식물도 이와 같거나 혹은 더 적은 수의 조상들로부터 생긴 것으로 믿는다. 유추를 통해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동식물이 어떤 한 원형으로부터 생긴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종의 기원에 대한 견해가 일반적으로 인정될 때, 박물학에서 상당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종이라는 용어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그리고 발견될 수 없는 본질을 찾아내려는 헛된 수고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박물학의 다른 보다 일반적인 부문들 ― 유연관계, 관계, 형의 공통성, 부계, 형태학, 적응 형질, 흔적 기관 및 발육 불완전 등 ― 이 비유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분명한 뜻을 가지며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또한 변이의 원인과 법칙, 상관관계, 사용과 불사용의 효과, 외부조건과 직접적인 작용 등에 대해 전인미답의 큰 연구분야가 열릴 것이며, 사육 생물에 대한 연구가치가 크게 증가할 것이다. 분류의 규칙 또한 계통추적의 원리에 의해 분명히 더 간단해질 것이다. 또한 발생학은 각 강의 원형의 구조를 밝히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지질학은 과거의 생물들을 추적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나,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장차 점진적인 단계에 의해 정신적인 능력이 필연적으로 얻어진다는 기초 위에서 심리학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인류의 기원과 그의 역사 연구에 많은 빛을 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구 위의 과거와 현재의 생물들의 생성과 절멸은 개체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원리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생각이 창조론적인 생각보다 더 잘 일치한다. 과거로부터 미루어보아, 단 하나의 살아있는 종도 그것의 변화되지 않은 모습을 먼 미래까지 전할 수 없을 것이며, 현재 살고 있는 종들 중 극소수가 어떤 종류의 자손을 아득히 먼 미래까지 전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종들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완전히 절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캄브리아기 훨씬 이전에 살았던 것들의 직계자손이므로, 우리는 통상적인 세대 계승이 결코 한번도 끊어지지 않았으며, 어떤 격변도 전 세계적으로 생물을 몰살시키지는 못했음을 확신해도 좋다. 그리고 자연선택은 오로지 각 생물의 이익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작용하므로 모든 신체적 및 정신적 재능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소수 또는 하나에 조물주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졌으며, 이 행성이 고정된 중력의 법칙을 따라 공전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런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극히 아름답고 극히 놀라운 수없이 많은 형태들이 진화해 왔으며, 현재도 진화하고 있다는 견해에는 장엄함이 있는 것이다.

A. Desmond and J. Moore, Darwin (Harmondsworth: Penguin, 1992), ch. 8-13

Frank Sulloway, “Darwin’s Conversion: The Beagle and Its Aftermath,” Journal of the History of Biology 15 (1982), 325-396

다윈은 언제, 어떻게 스스로 진화론자가 되었을까? (1) 비글호 항해 전부터 (2) 항해의 첫 1,2년 사이에 (3) 갈라파고스 군도에 도착해서 영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4) 영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다윈은 이 질문에 대해 비일관적이다. 그가 남긴 문헌들에는 (2),(3),(4)의 답변이 혼재되어 있다. 최근 몇 십년 사이에, (4)의 결론이 우세해지긴 했지만, 다윈의 개종 시점은 단서 문헌의 시점 결정의 어려움 때문에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더구나 개종의 뒤에 숨어있는 진짜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되지 못해왔다. 이 글은 개종의 정확한 시점보다는 그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이 글은 그의 과학자 동료들의 지적능력과 다윈의 천재성을 구별시켜줄 것이다. 본문에서는, 갈라파고스 군도에 도착한 1845년 가을부터 종의 변이에 대한 노트 시리즈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1837년 7월까지의 개종 이야기를 재구성할 것이다.

1835년 10월 갈라파고스 군도를 방문한 이후 언제쯤, 다윈은 다음의 조류학 노트의 유명한 도입부를 남겼다. ‘….표본들이 섬마다 다르다. 각 섬에서는 각 종류가 배타적으로 발견된다. … 그러나 조금 다르고.. 나는 그들이 단지 다양성(only varieties)으로 생각한다. …’ 다윈이 처음으로 진화에 대한 명백한 암시가 담긴 이 구절은 그 시점과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시점을 찾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잘못된 철자의 사용빈도가 시기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이용하여 시기를 추정하는 방법과 둘째, 섬마다 다른 종류의 동물을 수집했다는 점과 다른 11개의 노트와의 비교를 통해 시기를 추정하는 방법이 있는데, 첫째 방법에 의해서는 1835년 11월 전이거나 1836년 9월 중순 이후로 추정되며, 둘째 방법에 의해서는 1836년 4월 12일부터 7월 19일 사이로 추정된다. 더 정확하게는 6월 14일부터 7월 19일 사이로 추정된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해석의 문제이다. 위 구절은 오히려 ‘단지 다양성’일 것이라고만 하면서 변이를 거절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35년 9월 중순에 만난 갈라파고스 군도 관리 부소장 Lawson은 섬마다 거북이가 조금씩 다르며, 그는 거북이를 보면 어느 섬의 거북이인지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윈은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실제 다윈은 거북이를 인도양의 거북이와 혼동했고(이름도 그렇게 지음), 자연종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람이 이주시켰을 것으로 생각했다. 거북이의 다름의 정도를 알기 전, 그는 섬마다의 지역적 차이는 어느정도 있을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어느 섬의 나무가 크고 작고 식의 관찰은 다윈에게 큰 고민을 안겨주지 않았다. 갈라파고스에서 처음 본 거북이와 두 번째 본 거북이는 조금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비슷했고, 등딱지를 비교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록하지도 표본을 만들지도 않았다) 정말 다르게 생긴 Hood 섬의 거북이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증거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 거북이들을 먹어치우고는 등딱지들을 다 버렸다.
실제 연구에서 증거로 활용된 거북이는 애완용으로 가져온 2개의 거북과 피츠로이의 2개의 거북뿐이었고, 다윈의 거북은 너무 어려서 증거로서의 가치가 적었다. 한편 다윈은 영국에 돌아와 거북이에 관한 다른 연구자의 발표를 듣고 나서야 증거를 발굴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새로 연구하는 데에는 꼬박 10년이 걸렸다.
핀치(finch)는 어떠한가? 핀치의 차이를 연구한 것 또한 영국에 돌아와서 다른 선원에게 빌린 ‘조심스럽게 이름지어진 수집물’을 통해서였다. 그럼에도 지역성에 대해 오류, 혼동 계속됐다. 다윈의 핀치라는 오해는 다윈이 발표한 지역성 정보가 그 자신의 핀치 표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착각한 사람들 때문이다. 특히 핀치의 부정확한 지역성 때문에, 다윈은 그것을 종의 기원에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를 지리적 단절에 의한 종분화의 입증사례로 보는 것은 부적당하다. 한편, 다윈은 항해 동안 핀치를 제대로 분류할 수 없었고, 어느 경우엔 완전히 다른 새로 오해하기도 했다. 또한 전문가가 보기에도 이것만을 보고서 어떠한 발견을 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핀치에 대한 평가는 갈라파고스 군도의 모든 증거를 전체로서 평가하고 수용할 때 가능하다. 이는 갈라파고스를 떠난 후, 오개념을 수정하고 나서야 가능했으며, Gould 등의 분류학자의 폭넓은 분석 이후에야 가능했다는 말이다.
결국, 다윈은 항해 동안 어떠한 확신도 결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식의 ‘모호한 의심’은 있었지만, 완전히 수용할 수는 없었다.

비글호 항해 이후, 다윈은 그의 수집물들과 표본들을 각각의 학자들에게 맡겨 조사를 의뢰했다. Owen은 부탁받은 아메리카의 뼈 화석을 분석하여 매우 큰 설치류 등을 만들어냈다. 이에 관심을 가진 Lyell은 특징적인 둥물과 비슷한 화석이 그 대륙에서만 발견되며, 현존하는 종들은 그 대륙의 다른 종들과 가까운 해부학적 관계를 가진다는 계승의 법칙을 주장했다. 다윈은 이를 1837년 2월 17일에 들었을 것이다. 계승의 법칙은 다윈의 개종에 영향을 미친 세가지중 하나이며, 나머지 둘은 런던 동물학 학회로부터 많은 빚을 지었다.
다윈은 1837년 1월 4일 항해 동안 수집한 조류와 포유류를 런던 동물학 학회에 보냈다. 학회장인 굴드와 다윈은 정보를 교환한 것으로 추정되며(굴드가 다윈의 설명을 듣고 자기 견해 수정), 다윈은 굴드로부터 그가 수집해온 26종의 새 중 25종이 갈라파고스에만 사는 토착종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또한 각각이 모두 다른 종이라는 설명을 듣는다.(종과 지리적 단절 사이의 관계) 이 시기는 2월 학회와 3월 학회 사이로 추정되며, 이는 다윈의 개종에 마지막 촉매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윈의 변이에 대한 사색이 처으으로 담겨있는 빨간 노트(Red Notebook)은 매우 중요한 단서인데, 이 노트는 1836년 언젠가부터 1837년 5월 또는 7월까지 쓰여졌다. 이 노트에는 지리적 단절 및 단절이 없는 종분화 메카니즘에 대한 고민과 조직구조의 (환경보다는) 지역적 근접성과의 상관성이 언급되어있다. 최초로 그러한 사색이 담겨있는 구절은 굴드와의 만남 이후로 추정되며 그 만남과 대화가 다윈에게 확신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여행중에는 종(species)과 다양성(varieties)을 구분하지 못하고 뭉뚱그려 관찰할 수밖에 없었지만, 굴드로부터 종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고 구분할 수 있게 되면서 확신을 얻은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노트가 112페이지까지는 가로로, 113페이지부터는 세로로 쓰여졌는데, 앞부분은 여행중에 쓰여진 것이고 뒷부분은 여행에 다녀와서 쓴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 뒷부분은 2월 중부터 쓰여졌으며, 처음으로 진화에 대해 언급한 127페이지는 3월의 동물학 학회 이후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계속되는 고민이 빨간 노트에 순차적으로 담겨있으며, 변이에 대한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한 7월, 빨간 노트는 끝이 난다.

결론적으로, 다윈은 항해중의 발견에 의해 개종하지 않았다. 다윈은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는 진화의 증거들을 정확하게 발굴할 목적도 능력도 없었다. 항해 중에 그는 그가 앞으로 펼칠 이론과 무관하게 단지 적은 수의 표본만을 수집해왔다. 그가 진화론의 단단한 겸험적 기반을 마련하기까지는 갈라파고스에서 돌아와 꼬박 10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는 당연하다. 다윈의 사례는 대부분의 과학적 증거가 축적되는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과학은 전설과 달리 관찰과 실험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제공된 증거를 간과하는 일은 과학사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일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다윈이 진화론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자료를 보고도 다른 전문가들은 개종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어리석고 편견에 가득차서는 아니다. 이는 다윈 본인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개종을 시킨 것은 증거가 아니라 다윈 본인이기 때문이다.

Ralph Colp Jr., “‘Confessing a Murder’: Darwin’s First Revelations about Transmutation,” Isis 77 (1986), 9-32

다윈이 자신이 진화론자임을 밝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가에 대해 분석한 글이다.
다윈은 자신을 “그의 발견에 비해 불행한” 과학자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을 과거의 브루노나 갈릴레오와 비교하며, 자연선택을 발견하지 1주전인 1838년 9월 21일에는 “도망치지 않고 영웅처럼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하고 1년동안 그는 자세한 내용은 숨긴 채 몇 사람에게 힌트를 주었다. Henslow, Lyell은 이를 무시했고, 다윈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Lyell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자신의 생각이 Lyell과의 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했다. 다음으로는 박물학자인 Waterhouse에게 분류법에 대한 입장 ― 생김새의 유사성에 따른 분류가 아닌 진정한 관계에 따른 분류 ― 을 편지로 제기했지만, 불쾌하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으며, 그 이후 Waterhouse가 계속 비글호의 동물과 곤충에 대한 정보를 보내주었지만 그의 관점과 맞지 않았다. 이후 그는 Hooker로부터 비글호의 식물들에 대한 정보를 받기 시작했다.
1844년 11월, 괄호에 confessing a murder라는 언급을 하며 조심스럽게 종의 변이에 대한 입장을 Hooker에게 편지로 보냈다. 여기서 confessing a murder란 그 시기 이데올로기적 환경에서 그의 이론이 살인과 같이 보여질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 ― 그가 정보 뿐만 아니라 지적 자극을 위해 의존한 Hooker와 다른 사람들은 추방할 것이다 ― 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살인의 대상은 신, 신앙심, 부적절한 종을 가리킬 것이다) 다윈은 자신이 믿는 것을 고백하고 처벌을 받는 것이 정직하고 용기있는 것이라 믿어왔음이 분명하다.
Hooker는 다윈의 입장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다윈의 작업에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었으며, 다윈의 고민이나 질문들은 높이 평가해주었다. 아직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요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1844년 7월 5일, 다윈은 아내에게 자신이 갑자기 죽을 것을 대비해서 책의 출간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책의 편집자로서 여러사람을 언급하며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데, 가장 나은 편집자로서 Lyell을 꼽았고 그 다음으로는 Hooker를 꼽았다.
아마도 더 많은 사실들을 모아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지, 다윈은 Hooker에게 그 ‘요약’의 존재를 1년동안 밝히지 않았다.
한편, 1844년 가을, Henslow의 사촌 Jenyns이 다윈에게 몇가지 자료를 요청하면서, 다윈은 Jenyns에게 자신의 입장을 살짝 언급했다. Hooker에게 밝혔을 때와 같이, Jenyns에게의 밝힘은 급작스럽지만 실질적인 필요 ― 생존경쟁의 증거들을 얻기 위함 ― 에 의해서였다. 다윈은 그에게 두 번이나 편지를 보내 설명했지만 Jenyns는 이를 무시했다. Jenyns에게 이미 편지로 설명했기에 Henslow도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들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1844년 익명의 The Vestige of Creation에 대해 다윈은 Hooker에게 말이 안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 Vestige나 Lamark보다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다.
1845년 다윈의 Journal of Researches의 새판을 Lyell에게 보내면서, 자신의 입장 ― 변이는 빼고 ― 이 담긴 편지도 함께 보냈고, 거부당했다. (6년 뒤 1851년 다윈은 Lyell에게 변이에 관한 입장을 얘기했지만 거부당했다. 또한 1860년대에도 Lyell은 종의 기원을 지지하지 않았다.) 1845년 이후, Lyell의 노예제에 대한 입장에 대해 다윈은 간접적으로 Lyell에 대한 분노를 표시할 수 있었다.
1845년 10월, Vestige에 대한 Sedgwick의 혹평을 보고, 다윈은 Lyell에게 자신은 그런 평이 나올 줄 알았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변이를 믿는다고 말했다.
1845년 다윈은 식물의 지리적 분포가 이주의 증거라고 Hooker에게 말했다. 그러나 Hooker는 그제서야 그에 대한 반대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다윈은 여전히 많이 고마웠고, 자신이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1846년 조개삿갓 조사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Hooker에게 밝혔고, 1847년 1월에서야 자신의 44년 ‘요약’을 Hooker에게 빌려주었다. Hooker는 코멘트를 달아서 돌려주었다. Hooker의 ‘나쁘다, 좋다’ 등의 코멘트는 다윈에게 많은 도움이 된 듯하다. 그러나 이후 Hooker는 그당시 자신은 다윈의 이론 전체를 이해하지도 못해고 적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1848년 암수한몸이 아닌 수컷이 암컷에 기생하는 조개삿갓을 발견하고서, 그해 5월 Hooker에게 당신이 뭐라든 자신의 이론은 확실히 진실이라며 단호한 편지를 보냈다.

다윈은 자신이 이론이 그들에게 거부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추방당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다윈은 거절을 당했음에도 그들과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이는 몇가지 이유로 분석가능하다. 첫째, 그는 개별 사람마다 그에 맞는 고백방법을 채택했다. Waterhouse, Jenyns, Bunbury에게는 변이에 대한 언급을 했다가도 그들의 거부의사를 확인하면 그 이후로는 침묵했다. Lyell과 Henslow에게는 변이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간접적으로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Lyll에게는 간접적으로 자신이 Sedgwick의 반론에 답변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Hooker에게 고백을 한 이후에는, 자신이 Vestige나 Lamark와 다름을 덧붙였다. 그리고 Hooker가 이론화를 싫어한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인지, 그는 그의 ‘요약’을 한참 늦게 보여주었다.
또다른 이유에는 그가 그의 분노와 좌절을 성공적으로 감추었고 그들과 논쟁적이지 않게 대화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윈은 자기 이론을 위한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조개삿갓의 사례를 발견하고서야, 다윈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단호해질 수 있었다. 다른 과학자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종의 기원에서, 그는 나이 많은 박물학자를 설득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젊은 박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지지해줄 거라 자신했다.

Barry G. Gale, “Struggle for Existence: A Study in the Extrascientific Origins of Scientific Ideas,” Isis 63 (1972), 321-344

Paul Eliot, “Erasmus Darwin, Herbert Spencer, and the Origins of the Evolutionary Worldview in the British Provincial Culture, 1770-1850,” Isis 94 (2003),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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