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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통론2] 뉴턴주의의 사회적 의미: 3주차 요약문 – 클라크 vs 라이프니츠 논쟁을 중심으로

hs_3.hwp <과학사통론 II 3주차 요약문>
뉴턴주의의 사회적 의미 : Newton(Clarke)-Leibnitz Dispute

날짜 : 2004. 9. 14 | 이름 :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Leibnitz-Clarke 논쟁 (생략. Koyre 글에 자세히 담았음)
Alexander Koyre, “Leibnitz and Newton”

1차 제기
① 영국에서의 신앙심 쇠퇴는 뉴턴 탓인가?
② 공간은 신의 (지각을 위한) 기관인가?
③ 지속적으로 태엽을 감아주는 신은 과연 완전한가? 지적능력이 부족하지 않은가?

1차 답변
① 신앙심 쇠퇴는 사실이나, 그것은 유물론 탓임. 뉴턴의 수학적 원리는 유물론을 배격하는 이론임. (무한한 진공의 공간에 비해 작은 양의 물질을 전제하기 때문)
② 공간은 신의 기관이 아니며 신은 그러한 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은 어디에나 직접적으로 존재함으로써 지각할 수 있다. 공간은 어디에나 있는 신의 sensorium과 같다.
③ 신은 무질서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영원히 작동하는 시계를 보존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신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2차 제기
① ‘수학적’ 원리 자체가 유물론과 동일하며, 그 내용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홉스의 주장과 같다. 한편, 중요한 문제는 수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며, 형이상학은 ‘충족적 근거의 원리’에 기초해야만 한다. (뉴턴의 수학적 원리의 내용이 그 원리에 위배된다는 함축)
첫째, 스피노자의 세계관과 유사하다.
둘째, 뉴턴의 신은 예지력이 없는 Socinians의 신과 매우 유사하다.
셋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도 진공을 인정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그들이 생각하는 물질의 양이 뉴턴보다 많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더 많은 물질은 신의 지혜와 힘을 행사할 더 많은 기회를 의미한다. 이는 진공이 불가능하다는 근거이다.
② Sensorium은 감각기관이다.
③ 신의 지속적인 (보존) 활동은 필요하다. 다만 세계는 더이상 고칠 필요가 없도록 창조되었을 뿐이다. 반면, 신이 세계를 계속 고쳐야 한다면, 그는 초자연적인 방법, 즉 기적을 통해서(그러나 기적을 통한 자연현상의 설명은 불합리하다) 또는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할 수 있다. 이 경우 신은 자연에 속한 존재인 anima mundi가 된다.

2차 답변
① 수학적 원리는 절대 유물론과 동일하지 않으며 전혀 반대이다.
첫째, 수학적 원리는 세계에 대한 순수 자연적인 설명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둘째, 충족근거의 원리는 맞다. 그러나, 충족근거가 단지 신의 의지일 수도 있다. (초기 위치 부여의 경우 신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음)
② 신은 intelligentia mundana도 intlligentia supra-mindana도 anima mindana도 아니다. 신은 세계의 안에도 밖에도 모든 것 안에도 모든 것 위에도 존재하는 intelligence다. 신은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Sensory라는 단어는 (감각)기관이 아닌 감각의 장소를 지칭한다. 또한 뉴턴은 장소가 sensoruum이라고 하지 않았다. 비교를 위해서만 썼을 뿐이다. 신은 모든 것을 그것에 존재함으로써 그것자체로써 지각한다.
③ 신의 개입은 신의 ‘영원한 계획’에 있는 것이다. 한편, 신의 활동은 자연스러운 것, 기적적인 것으로 구분될 수 없다. 기적을 통한 개입은 신의 지배를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한편, 신의 개입 없이는 우주의 motive force는 감소하여 결국 사라질 것이다.

3차 제기
① 클락은 공간에 대해 실재하는 절대적 존재라고 했다. 이는 문제 소지가 많다.
첫째, 그러한 존재는 영원하고 무한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신 자체 또는 신의 속성 중 하나로 여겨진다.
둘째, 공간은 부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것은 신에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 공간이 절대적으로 동질적이라 하면, 모든 점은 다른 점과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어떠한 물체를 특정한 곳에 위치시켰는지 근거가 있을 수 없다. 이로써 선택이 필요없는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을 주장. 공간은 물체의 공존의 질서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시간은 계승의 질서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근거가 없으면 선택을 할 수 없고, 선택을 할 수 없으면 하지 않는다. 동기 없는 선택은 진정한 자유와 반대되는 모호한 무차별이다.
② 지속적인 수리는 그의 기계의 비완벽성 뜻한다. 신은 그러한 불편을 피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취할 것이고, 그렇게 했다. ※ 이 또한 자기충족 요건 가정에 기반하고 있음.

3차 답변
① 공간은 존재가 아닌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자의 존재의 속성이자 귀결이다.
첫째, 공간은 분할 불가능하다. 무한한 공간은 하나이다.
둘째,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 논변은 모순을 야기한다.
※ 신은 선택의 자유가 있고, 선택의 근거나 동기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② 어디에나 있는 존재자로서의 신은 모든것에 본질적으로 그리고 substantially 존재한다. 그의 (거기에서의) 존재는 거기서의 작용을 뜻한다. 그가 없으면 작용도 없다.
※ 거기에 없으면 아무것도 활동할 수 없다. 신 또한. 원거리 작용은 없다. 신 또한. 그러나 신은 어디에나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그는 어디서나 작용할 수 있다.

4차 제기
① 선택 없이 작용이 없고, 결정동기 없이는 선택이 없고, 충돌하는 가능성 사이에 차이가 없으면 동기가 없다. 따라서 완전히 동일한 두개의 상황은 실재할 수도 가능할 수도 없다. 따라서 진공은 불가능하며, 공간은 물체의 기능일 뿐이다. 또한 물질(substance) 없이는 속성이 없다. 공간은 무엇의 속성인가? 공간이 절대적 실재라면, 신은 그것을 파괴할 수도 변경할 수도 없다. (인력의 문제 등에 대한 빈약한 반박들 계속됨. 뉴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함)
※ 이런 식의 제기는 동일한 물체가 불가능하다는 라이프니츠의 말이 맞다면 창조도 불가능(입자론의 입장에서). 따라서 더이상 분할할 수 없는 입자 부정함.

4차 답변
① 공간은 어떠한 substance의 속성이 맞다. 그 substance가 바로 신이다. 한편, 진공에는 물질 외에 가능한 많은 다른 substance가 있을 수 있다. 이로써 공간은 부분으로 분할될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② 진정한 운동은 절대운동이다.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실재한다. (절대공간의 개념은 물질의 무한성을 피하기 위함이자 창조의 개념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5차 논쟁 (생략. 앞의 논쟁과 많은 부분 중복)

논쟁의 종결과 그 이후
라이프니츠의 죽음으로 논쟁은 끝이 났다. 이후 뉴턴과학과 뉴턴철학은 더욱더 많은 근거를 얻게 되었고, 점차 데카르트주의자들의 저항을 극복해갔으며, 18세기 말 뉴턴의 승리는 완결되었다. 뉴턴은 승리했지만, 뉴턴의 수학적 원리는 점차 이신론 또는 입자론(유물론)의 입장과 동화되어 자연화되었고, 형이상학적 근거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된다.
인력의 문제 : 신의 작용이 아닌 자연의 작용으로 변모함. 인력의 원인은 단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됨.
공간의 문제 : 뉴턴이 말했던 속성은 그대로 남았지만, 거기서 신의 존재는 사라짐.
감소의 문제 : 뉴턴과학의 발전에 따라, 라이프니츠의 입장이 받아들여짐. moving force는 사라지지 않으며, 세계는 태엽을 감아줄 필요도 수리해줄 필요도 없어졌다.
신성의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100년이 지난 뒤, 라플라스는 나폴레옹의 ‘세계에서의 신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저의 세계에는 신이라는 가정이 필요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Steven Shapin, “Of Gods and Kings: Natural Philosophy and Politics in the Leibnitz-Clarke Disputes”

미적분 발견에 대한 우선권 논쟁에서 시작된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은 자연철학, 형이상학, 종교의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그들 논쟁의 주요한 쟁점은 세 가지 ― 신이 자연세계의 질서에 개입하는 방법, 진공의 가능성, 공간과 물질의 속성 ― 로 볼 수 있고, 그중 신학적 공리에 대한 견해차 ― 뉴턴의 신은 자율적 의지(will)가 강조된 신인 반면 라이프니츠의 신은 완벽한 지혜(wisdom)가 강조된 신이다 ― 가 근본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의 분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들 사이의 형이상학, 신학, 자연철학 논쟁의 중요성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사회정치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1680년에서 1720년 사이의 영국의 특수한 사회정치적 대립구도 하에서 특정 정치그룹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이 존재했고,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그 논쟁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1680년에서 1720년 사이의 영국의 정치적 쟁점과 대립구도
왕권계승의 정당성과 그것의 정치적 책임을 둘러싸고, 토리당, 휘그당 및 기타 급진파들의 대립이 형성되었다.
토리당 : 개인의 자유의지 부정, 완벽한 절대군주제 지지
(궁정)휘그당 : 개인의 자유 인정, 제한적인 군주제 지지 → 뉴턴의 견해와 유사성 존재
급진파 : 홉스주의자, 스피노자주의자, 공화주의자, 지방휘그 등 → 라이프니츠의 견해와 유사성 존재

결론
명예혁명 이후 주도권을 잡된 휘그주의적 저교회 분파는 급진적인 지방휘그나 자유사상가들이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 시기 휘그주의적 저교회 분파의 입장에 서있었던 클라크의 라이프니츠와의 논쟁은 급진적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클라크의 정치적, 이론적 투쟁이기도 했다. 여기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대한 정치적 이용은 라이프니츠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지방휘그의 정치적 입장의 관점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는 증거 또한 없다. 그러나 특정 철학적 견해들은 영국 내 대립하는 각 사회그룹에 의해 사용되었고,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정당화하는 데에 일상적으로 이용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의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또 한편, 당시 철학의 사회적 이용은 그 자체로 평가적이진 않았을지라도 자연철학자의 판단에서 핵심을 차지했다.

Margaret C. Jacob, The Newtonians and the English Revolution,
ch. 5 “The Boyle Lectures and the Social Meaning of Newtonianism”

보일강좌의 배경 – 뉴턴주의를 옹호한 성직자들의 공통된 관념
① 신의 의지에 조화롭게 작용하는 우주는 사회적․정치적 안정과 유사하다는 관념 공유
② 한편으로는 무신론, 이신론, 반종교론 등의 위협에 대항해야 한하는 관념 공유
③ 명예혁명 이후 사회적 상황에 맞는 새로운 사회철학 필요성 공유

보일강좌에 참여한 성직자들이 사용한 뉴턴주의의 구체적 내용
① 우주의 질서는 신의 의지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안정적으로 그 위계질서가 유지된다
② 뉴턴의 물리 이론과 운동법칙은 자연에 대한 신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Clarke)
③ 운동법칙에 의해 통제되는 자연세계 속에서 정치적 세계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④ 자연의 질서가 신의 의지에 의하여 통합적이고 조화로운 것과 같이, 사회의 질서도 조화롭게 유지되어야 한다
⑤ 인간은 (신의 의지에 의하여) 사소하고 하찮은 물질을 지배한다
⑥ 신에 대한 인간의 복종,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우위와 같이, 상층에 대한 복종과 위계질서가 잡힌 사회형태를 조화로운 사회이다

보일강좌의 사회적 역할
① 교회의 도덕적 권위 회복과 정치적 영향력 유지
② 뉴턴의 자연철학을 (온건)휘그주의 이데올로기와 통합하여 정치적 사회적 안정 도모

Toulmin, Cosmopolos (Chapter 3, The Modern World View)

1. “국민국가의 유럽”이라는 새로운 체제의 형성
1600년까지만 해도 봉건적 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던 유럽의 주요국가는, 종교전쟁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1650년 경 국민국가의 체제를 정립하게 된다. 그 시기 국민국가가 역점을 두었던 과업은 첫째 안정, 둘째 종교적 통일과 관용이었다. 이때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적’ 발전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국은 잠시 동안의 공화정을 거쳐 입헌군주제의 길을 걸었고,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길을 걸었다.
새로운 정치체제의 정립에 조응하여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관계 ― 계급사회 ― 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수직적으로 구획된 중세(당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의 사람인가?)와 달리 ‘주인없는 사람들’의 수평적인 사회계급 형성은 사회적 안정과 충성에 대한 위협으로 뚜렷하게 부상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다운 국민에 대한 관념 형성되기 시작하며, 왕권은 상송적 봉건 영지의 법적 계승권이 아닌 국민이나 민족의 상징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편, 새롭게 형성된 국민국가 내에서 개인들 및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할 ‘새로운 원리’의 정립이 필요했다.

2. 1660-1720: 보편교회 Ecumenism을 구상한 라이프니츠
17세기 사회 재건 사업의 두가지 과제는 첫째,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과 종교로 인해 반목해온 국민들 사이에서 대화의 통로를 회복하는 문제, 둘째, 봉건적 관계로부터 벗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안정적이고 통합적인 사회관계를 재정립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과제에 대해, 데카르트가 이성적 방법이 종교적 대립을 피해 확실성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던 것과 유사하게, 라이프니츠는 보편언어 이론이 정치적 신학적 마찰을 일고에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 수학적 상징체계를 도입하려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그는 모든 경쟁적인 교리가 공유하고 있는 ‘충족이유의 원리’에 의존하여 유럽의 신앙체계를 통합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3. 1660-1720 : 뉴턴과 새로운 코스모폴리스
여러 국가, 다양한 종파에 소속된 ‘석학들’에게 확신을 심어줄만한 지식체계 정립하여 공통의 세계관을 유지하는 일에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라이프니츠보다는 뉴턴이 더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는 일련의 공통된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상당히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근대적 믿음들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 대략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자연에 해당하는 관념으로는 ① 자연은 창조시부터 작동된 불변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② 자연의 근본 구조는 불과 몇천년 전에 정립되었다 ③ 물리적 자연의 대상들은 비활동적은 물질로 구성된다 ④ 창조 시에 하느님은 자연물들을 안정된 위계로 묶었는데, 이 위계서열 내에서 ‘보다 높은 것들’의 체계는 ‘보다 낮은 것들’의 체계와 결합한다 ⑤ 사회에서의 ‘행동’이 그러하듯이 자연에서의 ‘운동’은 아랫쪽으로, 말하자면 ‘보다 높은’ 피조물로부터 ‘보다 낮은’ 피조물들에게로 진행한다. 한편 인간에 해당하는 관념으로는 ① 인간에게 ‘인간다운’ 면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적 사고나 행동의 능력이다 ② 합리성과 인과성은 서로 다른 규칙에 따른다 ③ 사고와 행동은 인과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인과적 심리과학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④ 인간은 자연의 물리체계처럼 안정적인 체계를 사회 안에도 정립할 수 있다 ⑤ 따라서 인간은 두가지 생명이 혼합된 생을 영위하는 바, 일부는 이성적이며 일부는 인과적이다. 이성적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지적 혹은 영적이지만, 감정적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육체적 혹은 육욕적이다 ⑥ 감정은 이성의 작용을 방해하며 왜곡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이 신뢰받고 고양되어야 마땅하다면, 감정은 불신되고 제한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믿음들은 ‘타당성’을 충실하게 검증받은 적이 없었다. 이들은 ‘공리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적 비계들(intellectual scaffoldings)’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과학자들이 근대 물리학을 구성한 ‘골격’이었다. 사실상 근대의 비계는 일련의 잠정적이자 사변적인 절반진리들로 구성된 것이었으며, 이성주의 철학자들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비계는 논리적 증명뿐만 아니라 사실적 근거마저도 결여한 것이었다.

4. 1720-1780 : 근대성의 외전들
1700년대 이래로 새로운(뉴턴식) 자연관의 폭발적 수용은 ‘원전 외부’의 다른 요인들에 의존한다. 실제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이해한 사람은 드물었다. 여기서 ‘폭발적 수용’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 과장이긴 하다. 새로운(뉴턴식) 자연관(세계상)은 17세기 말 급성장한 진보성향의 소수 엘리트층에게만 유포되고 지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유포된 관념은 바로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안정과 (사회 계급들 간의) 위계의 원리를 하나님의 계획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자연관은 인간관이자, 과학적 장치일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장치였으며, 이를 빌어 주권 국민국가의 정치질서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1700년 경에 대중적 지지를 획득한 – 또한 그 덕택에 ‘실질적으로 정립되는’ –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 과학적 세계관은 행성운동이나 조류의 간만을 훌륭하게 설명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의 정치체계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5. 이성주의로부터의 이단계 후퇴
근대의 과학과 철학은 탈역사적인 추상화 작업이 아닌,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160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종교적 정치적 분쟁은 베이컨식 경험주의의 자신감을 쇠퇴시키고 ‘수학적 확실성’에 대한 모색에 무게를 더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턴이 제시한 완전한 (수학적) 자연질서는 안정과 위계를 갈구하는 그 시대의 엘리트들에게 사회 질서를 정당화해주는 ‘코스모폴리스’를 제공해줌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즉, 과학의 성공은 이 설명의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고려에도 의존했다. 지난 세기의 과학적 활동은 오늘날과 전혀 다르게 수행되었다. 예컨대 뉴턴 시기의 과학적 관념은 16세기 인문주의자(베이컨)들의 권고를 무시한 채, 실천적 결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유리된 채 성장했다. 과학자들은 베이컨의 정신을 거부하였으며, 기술의 편에서가 아니라 신학의 편에서 과학을 추구했다. 일반독자들 또한 새로운 과학이념의 코스모폴리스적 함축이 주목거리였다. 즉, 정치적 의무며 사회구조 등과 관련된 코스모폴리스적 주제들이 독자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이제 과학사 연구에 꼭 추가해야 할 질문이 있다. 첫째, 특정한 시대의 과학자들, 그리고 과학의 독자들에게는 과연 무엇이 ‘현안’이었던가? 둘째, 무엇이 새로운 과학이념을 ‘상식’으로 통용될 만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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