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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uNow] 선배들의 질주, 그 착잡한 풍경: 총선감상 – 가장 힘 센 세대의 모순과 트라우마 by 깜악귀

1.

총선 결과 열린우리당이 제 1당이 되었다. 노무현 일병 구하기는 성공했고 정치권의 세대갈등은 끝나지는 않았지만 일단락되었다. [반지의 제왕]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갠달프여, 이제 당신이 중간계에서 가장 힘 센 분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소.” 총선 결과 내 머리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올랐다. “386이여, 이제 당신들이 중간계에서 가장 힘 센 세대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소”

2.

물론 여기에는 어폐가 있다. 민주노동당에도 한나라당에도 386세대의 활동가는 얼마든지 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정도 주류안착개혁시도형-386들을 이야기한다. 기성세대에 비해서는 개혁적이나, 판을 엎기 보다는 판에 진입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내 생각에 지금은 이 세대가 사회에 “진입”하는 시기이며, 이미 “진입이 성공리에 끝났음을 증명하는” 시기의 초입이다.

3.

이것은 비단 정치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경제-문화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부문에서 386들의 힘이란 직원 규모 100명 안팎의 벤처 부문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유명한 포털 사이트들이나 인터넷 관련 업종들, 그러니까 90년대 들어 갑자기 급부상한, “젊은 기업들” 말이다.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운동하다가 잠적, 용산에서 컴퓨터 부품 가계를 창업하여 숨어 살다가 결국 관련 벤처 기업의 사장이 된 케이스도 많다.

4.

문화쪽에서 말하자면 영화 쪽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 같다. 386감독들은 그 이전 감독들과는 명백히 다른 감성과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최근의 성과는 상업성과 Well-Made함을(물론 ‘작품성’을 포함한) 고루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설득력의 문제다. 상업성과 웰-메이드함을 둘 다 붙잡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거다. 단순히 상업적인 노림수로만 작품을 만들지 않되, “단순히 상업적인 노림수만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라는 점을 상업적인 노림수로 두는 것이다. “상업적인 노림수만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면 성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역시 상업적이다. 당연하다. 상업 시스템 속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 만들어지는 영화이니까. 과거회상의-역사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

헐리우드 스펙터클 보다 “한국사를 다룬 스펙터클”이 더 잘 팔릴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단순 상업영화가 아니다”라는 아우라도 획득한다. 이것은 나쁘다고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난 시절의 영화들이 상업적이라고 했을 때 지나치게 “이건 상업적이려고 만들었습니다요”라고 영화 전체가 웅변조로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요컨데 뻔한 상업적인 영화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도 “뭔가 다른 것을 보았다”라는 느낌을 제공받고 싶어하는 허영심이 있는데, 이런 것을 충족시키는 것도 대중문화의 할 일이다. (필자가 비디오방 일을 할 때 일인데,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노란머리”라는 영화가 비디오방에서 그리도 잘 나갔던 이유는, 그 영화의 메시지에 동감해서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성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는데 야하다는 소문도 있다는 것이…… 대중들이 대중문화에 대해 가지는 열등감과 허영심이 얽힌 복잡한 심정인 것이다)

5.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별 것 아닌데, 이런 것을 잘 하는 재능이 386의 재능이 아닐까 싶다. 정치권에서도 “명분은 이 쪽이 있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캠프는 이 재능을 뛰어나게 발휘했다. 필자의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노무현 캠프의 선전광고를 보면 놀라운 것들이 많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제 피아노 살 돈을 아버지가 노무현 아저씨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저는 울었습니다. 제 피아노 살 돈인데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먼 나라로 떠나올 필요도 없었을 거라며……” 이회창 진영 쪽은 이런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 저 광고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다. 왜 외국으로 떠나갔는지 알 게 뭐냐. 하지만 “여자아이”, “피아노”, “해외로의 망명(?)” 등의 기호는 대단한 효과를 발휘한다. 여기에서 실제로 그 가족이 어떤 정치적 연유로 해외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서 누구나 자기 낭만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혹은 오마이뉴스 같은 인터넷 대안매체 뿐 아니라 다음(Daum)과 같은 인터넷 포탈에 있어서도 명분은 중요하다. 그들은 “대안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서슴지 않고 사실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러하다. 탄핵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이슈에서 Daum의 경우 주요 일간지에는 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진보적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거기에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라든가 하는 매체 그 자체에서 나오는 진취성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참여적”이라는 것이다. 여러가지 명분을 하나로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대중적일 수 있는 능력이다.

6.

쉽게 말해서 이런 것은 386정서다. 이들은 “명분”을 조직화하는 일에 능하며, (아마 이들이 학생운동하던 시절에는 그러지 못하였으려니와) 주류에 어느 정도 진입하기로 작정한 이후에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힘을 획득하는 데에도 능하게 되었다. 명분이야 말로 잘 나갈 수 있는 힘이다. 대중은 히어로를 원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이건 이미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기성세대에 맞서는 거의 유일한 방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명분”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힘이기도 하다. 386들이 “대중적인” 것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싶다. 그것은 기성세대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도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들은 자기 만의 방식으로 대중적이려 하는데 여기에서 “명분”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쿨하게” 여겨진다. 여기에서 386들이 그들의 후세대와 일종의 공모가 있다는 것은 이해할 법하다.

7.

정치-경제-문화의 영역에서, 이들은 자신의 지분을 거의 확립해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그야말로 전 세대가 늙어서 은퇴하기를 기다리면 된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어차피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386의 후세대들도 윗세대보다는 386을 지지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도 그다지 오래 지나지 않아서 “기성”세대라는 말로 불리는데 문제가 없게 될 것이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386은 힘이 세다. 이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들이 힘이 센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대학시절(한국사회 인간들의 정신적 사춘기 시절) 그들이 겪었던 공통의 열병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그 세대 전체에 공통의 정치적-문화적 경험을 만들어놓았다. 첫째로 이것은 그들 세대 특유의 조직력을 만들어내었다. 벤처회사의 사장 이후 간부 급 중에 서로 운동하던 시절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인맥으로 엮어져 있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한 경우 “함께 운동하던 시절, 이미 능력과 근성을 검증한 사람”을 데려다 쓰기도 한다. 노무현 캠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꼭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시절, 강력하게 공유한 그 무엇이 있다”는 유대감도 크게 작용한다. 둘째로, 이러한 공통기억은 위에서 언급한 명분과 대중성을 함께 가져가는 힘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들은 수배까지 받아가면서 명분을 조직화하는 데 골몰한 세대이다. 그리고 주류에 진입하면서 대중을 사랑하는 기술까지 노회하게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8.

“80년대 공통 열병의 기억” – 이것은 이를 겪었던 386세대들에게 일종의 노스텔지어로 작용하기도 하고 트라우마로 작용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위시해서 최근의 한국영화가 과거 한국사회의 외상을 잔인하게 헤집으면서 동시에 대충 봉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재미있다. 정신적인 외상의 특징은 그것을 단순히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추고 부정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노출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군대에 다녀온 사람은 피해의식과 함께 보상심리를 가진다. 동시에 그것을 매우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한다. 만약 단순히 자랑거리라면 누가 그 경험을 조금이라도 무시한다고 해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리는 없다. (유승준이 왜 축출되었느냐 말이다. 국민들의 애국심 때문에?) 그들은 동시에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 안에는 분명히 비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이 겪지 못한 비인간을 겪었다”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랑이 되며 한편으로는 수치가 된다. 감추면 상처이나 드러내면 자랑인 것이다. 더구나 드러냈을 경우에 그에 공감하고 지지해줄 수많은 남성동지가 있다.

한국사회 역시 남성중심 사회이므로 남성들의 공통 트라우마는 감추거나 부정되기 보다는 남성 공동체 속에서 자랑거리로 인정된다. 그리고 “느와르화”된다. “장르화”된다고 표현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강력한 “소설적 서사”를 형성하기 시작한다고 해도 좋다. 그래서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군대 이야기만 하면 소설이라도 하나 쓸 기세다. 나랑 같이 집회 나간 선배가 새내기를 앉혀 두고 2년 전에 집회 나간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 보면, 옆에서 도저히 “선배는 그 때 아무 것도 안 했잖아요”라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9.

“학생운동했던 기억”도 군대의 경험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 과거경험들은 단순히 “한국사회 진보를 위해 수배받고 산 속에까지 숨어가며 뛰어다녔던 자랑스러운 경험”만은 아닌 것이다. 내가 다녔던 벤처회사의 부사장은 과거에 자신이 전경들을 향해서 얼마나 날아차기를 잘 했는지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날아다녔으니 충분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여기에서 ”전경도 사람이잖아요.”라는 소리를 할 만큼 내가 속없는 부하직원은 아니었다. 다만 부사장은 그렇게 노동운동을 위해서 날아차기까지 했던 자신이 왜 “부사장”이 되어 있는지, 회사 내에 왜 노조 하나 허용하지 않는지 해명한 적은 없다.

여기에서도 트라우마는 느와르가 된다. 나는 386들의 그 시대의 여름의 기억이 그들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한다는 혐의를 품고 있는데, 아마 충분히 사실인 것 같다. 큰 열병을 앓으면 그건 생리적으로 어떤 기능적 손실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 집단적 열병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리고 그 정신적 손실은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으로 연결된다.

10.

내가 지금 어떤 세대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세대라고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했다는 증명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세대의 활동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현재 이들의 에너지는 정치-경제-문화에 있어서 한국사회의 자산이다. 다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코, 그들의 기억 속에서 그 여름의 열병이 그들에게 “자랑스러움”만으로 구성된 정서블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에는 수치라는 양념도 섞여 있는 것 같다.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유추할 수 있지만 운동이란 결코 자랑스러운 경험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학우에 대한 비참한 공격이 가해지곤 했다. 그 당시에 자신이 뒤돌아서도 옳았다고 지금 자신할 수 없다. 이런 것도 상처가 된다. 목적은 옳았으되 방법이 틀렸을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가 옆에서 잡혀가는데 겁먹어서 꼼짝도 못했을 수도 있다. 부모님의 가슴에 못 박았을 수 있다. 이쪽의 사회분석이 혁명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에 다분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배제했을 수 있다. 정치적인 것에 무관심한 누군가를 비난했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열병의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이런 일들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지난지 오래다. 그러나 이 세대의 과거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이러한 어두운 기억까지 묻어두고 있는 것이다. 자부심과 수치심이 뒤얽힌 기억의 영역은 성역이 된다. 정신적인 ‘소도’가 그들의 기억 속에 있다.

트라우마는 그 정신적인 외상을 가했던 과거를 다시 한 번 재현하고 싶어하는 힘이다. 촛불집회를 6월 민주화 항쟁의 연장선에서 보고 싶어하는 명명법에서도 나는 얼핏 그것을 본다. 노스텔지어와.. 축제와.. 자부심과… 은밀한 수치심의 보상욕구.

11.

대학에서 어떤 선배와 나눈 대화 한 마디. “386들이 정말 무서운 점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점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데 생태주의나 페미니즘의 영역에서 특히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전세대는 보수적이고 그 이후 세대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세대의 공통경험이야 기껏해야 스타크레프트 아닌가) 이건 대략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두려운 일이다. 이들도 그 전세대들처럼 “우리가 OO했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OO하고 있는 것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려는 음모야”라고 말하곤 하던 나의 전 회사 팀장이 떠오른다. 어떤 세대가 모든 점에서 옳을 수는 없고 모든 것은 시간이 흘러야 숙성하고 발전한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옳았던” 시기는 이미 노스텔지어의 영역이다. 그들이 이미 안정된 자신의 직장과 입지를 때려치우고 다시 한 번 거리로 나설 수 있지 않는 한. 아니, 이미 그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미 그들이 타도할 “권력”은 그들이 자신이니까. 내가 지금 사회권력에의 진입이 안 좋은 거니까 영원한 인디-운동권으로 남으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일까? 순수주의의 발로에서?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느끼는 그들 세대의 모순이 그들 자신들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 그에 대해 한 번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채, 자기 세대에 일종의 정신적 소도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현재,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한 노스텔지어와 봉합”이라는 차원 이상으로 적극적인 해명을 가한 일이 없다는 것이 두렵다. [고등어]든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든 [살인의 추억]이든.

나는 그들이 반성적 성찰을 완전히 잃어버릴까봐 두렵다 혹은 슬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운동권 선배가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다. 진리인 거 같다. 내가 일하던 회사의 사장은 노무현을 찍었을 것 같다. 사내에 노조를 불허하는 사장이 민주노동당을 찍었을 리는 없잖아. 옆 자리에서 일하는 누나가 상사(이 사람도 386)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있을 때 사장에게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회사에 “성폭력 폭로 자보” 같은 것이 걸리길 바란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야기해놨으니까 적당히 참아라”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을 과거회상의 노스텔지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트라우마는 평생토록 작동한다. 혹은 고착화되며 이데올로기와 사회적-국가적 정당화, 공동체를 거치며 강화되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눈치빠르게 기회만 있으면 자부심으로 혹은 자기학대로 전이된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구체적인 풍경은 이것이다. 내가 그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3차인가로 룸싸롱에 가서 가라오케에 여성 접대원을 끼고 노래를 부르던 그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 시절의 민중가요를 몇 차례 불러제끼고 나오던 그들. 이런 풍경이 나는 두렵다 혹은 슬프다. 과거 학생운동의 거물이었던 이들의 정치권 진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나올 때, 나는 두렵다 혹은 슬프다. 아마도 앞으로 이만한 정치적 경험을 공유한 세대가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는 점이 두렵다 혹은 슬프다. “젊은 사람들이 투표하면 세상이 바뀐다” 열린우리당이 암묵적으로, 혹은 드러내놓고 내뱉었던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여전히 그들인가부다. 정치적 느와르는 진행중이다. “젊은 세대” – 그것은 나와 같은 후세대를 겨냥한 말일 것이다. 내가 그들의 후세대라는 것이 나는 두렵다 혹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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