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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거시기다: 사회주의를 정의하기 위한 노력 by 진보누리 홍기표

1> 사회주의에 대한 218가지 용법

비트겐쉬타인은 “말의 뜻을 알려 하지 말고 말의 용법을 이해하라”고 한 적이 있다. 어차피 말이라는게 전후 맥락 속에서 뜻이 규정되고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무척 합리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전을 보면 사회주의에 218가지 뜻이 있다고 되어있다. 굳이 사전을 들먹이지 않아도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수 백가지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역사상 이렇게 다양한 용법으로 쓰인 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전라도 사투리에 ‘거시기’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 용어는 그러니까 <포괄적 총괄 일반명사>쯤 된다. 거의 모든 사물현상에 대해 지칭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어떤 뜻으로 말하든지 듣는 사람이 알아서 들으면 되는 말이다.

사회주의란 말의 용법도 거의 이 정도 수준이 된 듯하다. 이쯤 되면 그 용법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누군가 그 뜻을 정립하는 노력이 필요해진 셈이다.

2>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중간에 있는 것.

사회주의란 내가 생각하기에 <전체주의>와 <개인주의>의 중간에 있는 개념이다.

사회주의란 말의 최초 용법은 개인주의에 대한 반대말로 시작되었다. 흔히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려진 오엔이나 생시몽 같은 사람들이 당시 유행하던 개인주의에 대한 반대 개념을 찾다가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주의의 기원인 것이다. (개인주의의 기원은 계몽주의에 대한 지적 반동에서 시작했다)

따라서 사회주의라고 할 때 사람들은 가장 먼저 ‘사적 소유에 대한 반대’를 떠올린다. 내 생각에 이것은 약간 고정관념이지만 하여튼 이 말의 용법이 대충 이렇게 시작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둘째로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개념으로도 쓰여왔다. 제대로 실천하는 경우는 거의 본적이 없지만 어찌되었건 개념적으로 사회주의와 국제주의는 사실상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국제주의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라는 말과 원칙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예전에 도산 안창호가 “민족에 이익이 되는 것이 정의이고 민족에 이익이 되는 것이 진리”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민족주의에 대한 가장 잘된 정리이다.

<국산품 애용>은 민족주의자들의 낡은 구호에 불과하다. 사회주의는 애국심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효용을 방해하는 꼴을 못 본다. 미국영화를 보건 양담배를 피건 아무 상관없다. 저만 좋으면.

결국 사회란 사람하나라는 ‘개체’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국가나 민족 같은 어떤 명백한 경계선을 지닌 ‘전체’도 아닌 것이다.

‘사회주의’를 이렇게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모두 반대하는 거시기라고 정리할 경우 사회주의에 대한 히틀러식 용법 즉 국가사회주의나 스탈린식 용법 즉 극도의 전체주의 그리고 북한식 용법인 수령사회주의를 모두 사회주의라는 말에서 배제할 수 있다. 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 같은 극도의 전체주의를 비난하고 반대한 것은 당연한 사회주의의 본성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전체주의와 일당 체제는 모두 사회주의의 <적>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치강령에서도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바, 당은 다원주의 체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요컨대 사회란 개인도 아니고 전체도 아니며 ‘자유로운 개인간의 유기적 연대 상태’를 말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자유인들의 연합체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주적 사회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고정불변의 지배계급은 청산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란 결국 “자주적 사회연대주의”의 약자이다.

3> 사회주의는 지대와 혁신의 중간에 있는 것.

사회주의를 정의하는 가장 흔한 수법은 ‘소유와 조절’이라는 두 측면에서 정의하는 방법이다. 사회주의는 소유측면에서 사회적 소유이고 조절 측면에서 계획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유측면에서 사적소유, 조절 측면에서 시장조절이라는 자본주의의 두 측면과 명백하게 대립된다는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정의하는 쉬운 구분법이 된다.

물론 나는 이런 좀 오래된 구분법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유문제를 가지고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 정리를 시도할 경우 나타나는 문제가 많다. 이 때문에 혹자는 생산재는 공동소유, 소비재는 사적소유라는 구분을 시도하기도 하고 혹자는 개인적 소유와 사적 소유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런 구분은 기존의 기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개념구분의 실익도 없어 보인다. 어떤 사회이건 어차피 전체적인 소유형태는 매우 다양한 형식을 보장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소유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지대’를 압박해서 ‘혁신’을 촉구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경제학적으로 ‘지대’는 최초의 어떤 근거(즉 소유권)를 가지고 향후 지속적으로 생산물이나 경제적 효과를 독점하는 체제를 말한다.

가장 흔한 지대 즉 땅주인이 소작농에게 땅 빌려주고 지대를 받아먹는 모습을 보자. 땅 주인 (혹은 왕이나 영주)은 단지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최초의 근거 (= 소유권은 전혀 보이지 않는 근거이다)를 가지고 평생동안 놀고먹으면서 천년만년 빈둥거리고 오히려 더 잘산다.

이와 형식은 다르지만 현대에 존재하는 ‘이자’ ‘건물임대료’ ‘로얄티’ ‘인세’ ‘지적재산권’ ‘특허권’등등도 모두 본질적으로는 이 ‘지대’와 같은 현상이다. 이를테면 처음에 한번만 죽도록 노력해서 일단 면허 또는 어떤 지위 (=일종의 소유권)를 획득하면 그 뒤로는 별 노력 없이 살 수 있는 과거의 사법고시제도 등도 본질은 지대 현상이다. (현금인출기에서 빼먹는 수수료 800원도 일종의 유통지대다)

사회주의는 이 ‘지대’를 반대해왔다. 봉건적인 지대는 물론이고 특히 자본가들이 자본 투자라는 최초의 근거를 가지고 향후 지속적으로 생산물을 수탈하는 자본지대도 착취라고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이를 방해하고 개입하려는 무수한 노력을 한다.

카피레프트도 이렇게 보면 사회주의 운동이 틀림없다.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 등은 모두 현대적인 의미의 지대이기 때문이다.

최근 학벌 없는 사회를 추진하는 시민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 ‘학벌’이 문제되는 이유도 이것이 결국은 한번 획득하면 평생 욹어 먹는 ‘지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벌에 반대하는 운동도 사회주의 운동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대와 혁신의 관계이다. 지대가 정착할 경우 생산력을 정체시킨다. 땅 주인들은 어차피 자기가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산혁신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불필요한 시도를 못마땅히 여긴다. 조선시대 지주들은 이앙법 도입에 반대했다.

특허권을 가진 사람은 자신보다 더 강력한 기술혁신이 등장하지 않기를 바라고 면허를 가진 사람은 자신과 같은 면허를 가진 사람이 되도록 줄어들기를 바란다. 구산업의 자본가들도 ‘신’산업이 등장해서 자기 자본 투자의 효용이 무너지지 않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다. 현실에 ‘경쟁’이라는 숙명만 없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오래 전에 새로운 지대형식을 안착시키고 생산력은 정체되었을 것이다. (특허나 지적 재산권, 그리고 학벌까지 모든 형태의 지대는 다 이런 속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지대’란 일단 창설되면 생산력을 안정 혹은 정체시키려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지대는 ‘혁신’을 방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대의 수명을 어떻게 얼마나 단축시키느냐 라는 문제가 얼마나 혁신을 촉구하느냐 라는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있다. 지대의 수명과 혁신의 주기가 서로 비례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신분 또는 계급에 의해 이 ‘지대’ 짜임새가 구축되고 분배되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계급을 반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대에도 자본가들이 일은 안하고 자본 소유권이라는 최초의 근거를 통해 평생 놀고먹는다고 보는 사람들은 결국 자본가 계급이 존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지대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한 단위의 현재를 희생해서 100 단위의 미래를 얻고 싶어한다. 지대의 욕망은 소멸하지 않는다. 더욱이 적극적인 차원에서 지대란 창설과정에서 혁신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혁신은 지대창설을 소망하는 인간 욕망의 결과물인 측면이 있는 것이다. 즉 지대를 창설하기 위해 사람들은 혁신을 촉구하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 지대와 혁신은 완전히 대립적인 현상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지대와 혁신은 시간상의 문제일 뿐이다.

결국 사회주의의 목표는 지대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목표는 지대를 조절하고 압박해서 혁신을 촉구하는데 있다. 카피레프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카피라이트를 무조건 왕무시 하는 게 아닌 이유는 이런 맥락이다.

4> 바보들은 맨 날 사회주의 탓만 한다.

사실 나는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무슨 주의자를 자처하는데 부담스러워 하는 편이다. 한때 동물의 왕국을 보다가 고릴라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용법이 워낙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이 혼란한 틈을 타 나도 새로운 용법을 하나 추가 해보려고 해본 거였다.

나는 아마 열 여덟살 때인가 스스로 흥사단 주의자를 표방했던 이래로 여러 번 이런 주의자 저런 주의자를 자처했었다. 물론 나 스스로 자처했던 그 주의에서 ‘탈퇴’한 적도 서너 번 된다.

이렇게 생각의 말을 여러 번 갈아타면서 나는 인간의 생각은 자주 바뀐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무 주의도 안 갖고 사는게 대안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하여튼 나는 나 자신의 내부 준비 문제로 무슨 주의자라기 보다는 무슨 파 라는 개념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정치적으로는 다원주의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민주 사회주의자이고 경제적 차원에서는 경쟁이 지대를 압박한다고 보기 때문에 시장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당은 정치강령에서 다원주의를 표방하고, 경제 강령에서 사회적 조절을 우위에 두고 시장을 활용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사랑한다. 90년대 초반 박노해와 함께 사노맹을 이끌었던 백태웅씨는 사회주의를 이렇게 정의했었다.

<억압과 착취에 대한 반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전망, 진보와 발전에 대한 신념,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투쟁>

내가 본 사회주의에 관한 정의 중에 가장 비논리적이고 찬양일변도였던 이 정의를 나는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얼마전 당대회에서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발전시킨다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얘기가 논란이 되었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기존의 자기 용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현 단계는 자주 민주 통일 단계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표방해서는 안 된다는 한별이네 주장은 북한에 대한 애정만 있고 사회주의에 대한 애정은 없는 주장이다.

사회주의는 고정불변의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그날 그날 부딪히는 현실에 대한 개척이며 운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중간에 있는 것이며 지대와 혁신의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추구하는 이상은 말로는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사회주의라는 이 시대의 금지된 용어를 탓하기 전에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민중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상상력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용법을 창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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