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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 지적 패러다임의 변화, 그 험난한 삽질의 과정을 아는가

texts.hwp 내부를 볼 수 없는 블랙박스에 무언가를 넣고 손만을 이용해 그 안에 있는 물체를 맞추는 게임을 한다고 하자.
게임의 참가자들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갖 감각을 활용하여 물체를 맞추려 할 것이다. 생김새, 촉감, 크기 등을 종합한 후에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맞추면 된다. 그러나, 과연 게임 참가자들은 게임이 진행되는 순간 경험한 자신의 감각만으로 물체를 맞출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물체를 맞추기 위해서는 한가지가 더 필요하다. 학습을 통한 기존의 지식 없이는 블랙박스 안의 물체를 맞출 수 없다. ‘이러이러하면 이것이고, 저러저러하면 저것이다’라는 기존의 지식과 현재의 경험이 결합될 때만 블랙박스의 물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레몬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블랙박스에 들어있는 레몬을 맞출 수는 없다. 아마도 그 어린아이는 “못생긴 귤”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무언가 불만족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저렇게 못생긴 귤도 있나보다”라고 자기가 알고 있던 귤에 대한 지식에 조금의 변형을 줄지도 모른다. 물론 어른이 “저건 레몬이란다”라고 설명해주면 아이는 쉽게 “네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없거나, 또는 어른이 말해주는 것이 자꾸만 자신의 감각경험과 배치된다면?

신대륙을 발견하고, 기존의 지식과 어긋나는 사실들을 발견하고, 기존의 지식에서 설명해주지 않은 각종 새로운 것들과 현상들을 마주하게 된 유럽인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려 노력했을까.
가장 일차적인 노력은 기존의 텍스트들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들이 참조할 수 있는 모든 텍스트들을 동원하여 퍼즐맞추기를 하거나 덧붙이기를 한다. 그렇게 기존의 텍스트들은 덕지덕지 짜맞추어진 누더기가 되어가지만, 그들은 쉽사리 그들의 고전을 포기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다 플라톤을 보고 데모크리토스를 보고 이리저리 텍스트들을 조합한다. 그리고 도저히 설명이 안되면 “그 문구는 상징일 뿐이었어”라고 후퇴한다.
성서의 가계보를 투철하게 믿어왔던 유럽인들은 신대륙의 인디언들을 어떻게든 그 안에서 설명하려 해보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시점에서 성서의 이야기를 ‘실재’에서 ‘상징’으로 퇴각시킨다. (성서는 점점 상징의 문제, 해석의 문제로 후퇴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다. 지금의 크리스천은 500년전의 크리스천과 어떤 면에서는 전혀 다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똑같다. 핵심적 문제의식만 살아남아 전수되고 있다고 해야할까. 핵심적 문제의식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종파가 나뉘어지고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정리하자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지면부족을 이유로 몇가지로 요약정리하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지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야말로 삽질의 연속이었다. 신대륙 발견 200년이 지나서야, 베이컨은 우리가 고대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걸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나 험난했다.

베이컨은 후퇴에 후퇴며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케케묵은 텍스트들을 조롱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여러 지역에 관해서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단지 자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 물론 신대륙의 여러 지역에 관해서는 심지어 소문이나 믿을 많나 근거를 통해서라도 알 턱이 없었다… 지금 보면 교외의 소풍 정도로나 간주될 데모크리토스, 플라톤, 피타고라스의 나들이가 그 당시에는 무슨 대단한 것인 양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리고서 또 베이컨은  “작업과 그 작업으로 드러난 결과는 그 자체로서 철학적 진리를 지탱해주고 보증해 준다”고 말한다.

무지와 편견으로 가득찬 케케묵은 텍스트들을 벗어버리고 실제 경험을 관찰하고 추론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베이컨은 옳다. 하지만, 경험만이 진리를 제공한다는 베이컨조차도 자신의 생각들을 케케묵은 텍스트들 중 몇으로부터 참조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참조 없이는 베이컨은 죽을 때까지 그러한 혁명적인 입장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베이컨이 강조했던 ‘추론’이란 과거의 지식과 자기경험의 연관방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베이컨은 틀렸다.

블랙박스 실험을 좀더 확대하여, 시간을 두고 많은 관찰과 맛도 볼 수 있게 해보자. 보다 많은 어린아이에게 실험해보자. 언제가 피실험자 중 블랙박스에 있는 레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는 아이가 생겨날 수 있다. 아마 그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 하겠지. “못생긴 귤같지만 귤과는 다르다. 맛도 다르고 껍질 두께도 다르며, 색깔도 좀 다르다. 다른 종이며 ***라고 이름 붙이면 될 것이다.”라고… 레몬을 귤이 아닌 무엇이라고 설명하는 그 아이는 그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귤’과의 비교 속에서, 그리고 지금까지의 해석틀인 맛, 두께, 색깔들로 그것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결국 그 새로운 해석 또한 과거의 지식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레몬을 이용한 블랙박스 사고실험은 솔직히 너무 단순해서, 패러다임의 전환 즉 새로운 지식체계의 수용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다. 아마 거대한 지식 체계에 대한 설명을 위해선 좀더 복잡한 지식형태와 좀더 복잡한 인간구성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 수용과정에 대한 한 단면 정도는 보여주는 듯. -_-;

과거의 사유방식 ―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 과 문제의식들은 현재 우리가 사고하는 데 어쩔 수 없이 차용될 수밖에 없는 굴레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수용하며 변해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고도 재밌는 일이 아닐까. 갑자기 생물진화 가설의 ‘돌연변이’가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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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적 패러다임 전화기의 그 삽질의 과정을 지루하다 싶을 만큼 매우 길게 서술해놓았다. 그러나 저자가 책의 두께를 줄이고 짧은 말로 “지적 패러다임의 과정은 200여년이나 걸렸고,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고 정리했다면 우리는 그 말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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