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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frey-Smith와의 만남

메일에 답장을 잘 안하는 그. 나의 메일에 하도 답장이 없길래, 2주 전 목요일 그가 강의하는 수업시간에 들어가 버렸었다. 수업이 끝나면 인사를 하고 만날 약속을 잡아야지 했는데, 막상 수업이 끝나자 몇몇 학생들이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한 명이 수업 내용과 관련하여 교수와 약간 토론을 하더니, 다른 한 명이 또 기다렸다가 교수와 얘기를 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그와 인사할 기회를 잡았다. 내가 “헬로우~” 했더니, 그가 “DongWook?” 하고 먼저 물어봤다. 학과 홈페이지의 visitors 페이지에 올라온 내 사진을 봤나보다. 그는 바로 언제 만날까 물어보면서 다음주는 봄방학이니까 그 다음주에 자기 오피스 아우어에 보자고 하길래 오케이 했다. 웬즈데이 트웰브 어쩌고 하길래 그냥 오케이 했는데 그게 바로 오늘.

좀전 12시에 그를 만나고 왔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무척 떨렸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영어로 -_-;; 부인은 만나서 말할 거리를 미리 준비해서 되도록이면 메모 같은 걸 적어서 가라고 했지만, 난 결국 아무것도 준비를 안 하고 갔다. 1월 말에 썼던 연구계획서만 들고서 말이다.

연구실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노크를 했다. 그는 직접 문을 열어 주었고 쇼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곳 생활엔 잘 정착했냐고 질문하길래 에브리씽즈 오케이라고 답해줬다. 그런 식의 인사말을 좀더 나눈 후, 그가 나에게 본격적으로 얘기를 해보라고 했다. 앗 당황;;; 어.. 어.. 나는 가방에서 연구계획서를 꺼내면서 이건 읽어봤냐고 물어봤더니 안 읽어봤댄다. 음…음… 하다가 이거 읽어보고 조언해줄 수 있겠냐는 (지금 생각하면 약간 당황스러운) 얘기를 던졌더니, 그는 그 주제와 아이디어를 지금 자기한테 얘기를 해보랜다. 어.. 음… 또 한번 당황…

처음 한 5-10분 정도 버벅거리면서 모델과 이론, 그리고 언어의 문제에 관한 얘기를 막 하다보니 나도 정리가 안 되고 그도 잘 이해를 못해하는 눈치길래 가방에서 연필을 꺼냈다. 그리고 연구계획서를 뒤집어서는 빈 페이지에 글과 그림을 그려가면서 얘기를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연구계획서에 살짝 얘기가 있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들을 마구 지어내면서 바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여기에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첫째, 많은 철학자들이 이론은 언어적 존재, 모형은 비언어적 존재처럼 얘기하곤 하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언어와 그림 사이의 표상 스타일의 차이에 따른 혼동이 빚어낸 것 같다. 언어도 그림도 세계와 지시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다만 언어가 세계를 지시할 때에는 유사성 관계가 필요하지 않지만, 그림이 세계를 지시할 때에는 보통 유사성 관계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특정 단어가 세계의 어떤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서 그 단어가 그 대상과 유사성이나 동형성 등의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 단어로 하여금 그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하자는 약속을 하기만 하면 된다. 즉 어떤 단어가 세계의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데 필요한 것은 사회적 약속뿐이다. 그러나 어떤 그림이 세계의 특정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그 그림과 대상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세계를 표상하는 데 때로는 유사성이 필요없는 언어적 형식을, 때로는 유사성을 필요로 하는 그림 형식을 섞어 쓴다. 즉 우리의 표상은 대체로 언어적 형식과 비언어적 형식(대체로 그림 형식)의 혼합체로 이루어진다. 전형적으로는 그림 형식의 표상을 모형, 언어 형식의 표상을 이론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모형과 이론 모두 언어와 그림을 섞어 쓸 수 있다. 즉 언어 형식이냐 비언어 형식이냐의 문제는 둘의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또한 내 생각에 언어와 그림 또한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둘 모두 세계를 지시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론은 언어적 존재, 모형은 비언어적 존재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며, 둘 모두 언어/비언어 혼합체이다. 혹시나 둘에 차이가 있다면 추상성/구체성의 차이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건 아직도 정리가 잘 안 되는 구나. -_-;; 연구계획서에 없었고, 머리속으로도 아주 어렴풋하게만 생각했던 것을 말하다보니 앞뒤가 정리 안되는 걸 얘기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다시 꼼꼼히 재정리를 해봐야 할 듯.)

둘째, 이상화된 모형은 정말로 세계의 대상 시스템을 표상하는가? 예컨대 완전경쟁시장 모형은 실제 시장을 표상하는가?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 모형을 통해 실제 시장의 어떤 점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모형이 실제 시장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실하게 답하기 어렵겠지만, 잠정적으로는 아니라고 답해보고 싶다. 나는 “모형 M을 통해 세계 W에 대해 배움”과 “모형 M이 세계 W를 표상함”은 다른 얘기라고 생각한다. 둘이 엄밀히 말해 구분되는 것이고, 이상화된 모형이 세계의 대상 시스템을 표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셋째로 넘어가서)

셋째, 그러한 표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 모형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형이라고 하면 필수적으로 표상하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표상하는 대상이 없는 모형이라니, 그것이 말이 되기나 한단 말인가? 하지만 앞에서 완전경쟁시장 모형은 실제 시장을 표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모형은 무엇인가? 나는 그 모형이 일차적으로는 기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집에 와서 잠깐 생각했는데, 그림으로 그려진 파이프는 파이프를 표상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 그림이 실제로는 파이프가 아니라 그림이라는 것을 안다. 곰인형은 분명 곰을 닮았고, 때로 곰을 표상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곰인형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곰인형이 곰을 표상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인형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일지 모른다. 즉, 모형은 무언가를 표상하는 대리물로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존재할 수도 있다. 과학에서 쓰이는 모형들은 자연과 연관되어 고안되었지만 그 자체로 기계처럼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즐길수도 있고 그 자체를 연구할 수도 있다. 그러는 순간 그 모형은 자연과학의 대상이 아닌 수학이나 공학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표상의 목적 없이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던 수학의 방정식이나 공학의 기계도 자연물의 모형이 될 수 있다. 이는 넷째로 연결된다.)

넷째(원래는 위의 얘기 중에 어딘가 들어가 있던 건데 정리하다 보니 순서상 여기가 맞을 것 같아서), 모형에 특별한 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모형이 될 수 있다. 물의 흐름은 물의 흐름일 뿐이지 그 자체로 모형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전기회로의 모형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과거 엔지니어가 만든 기계들은 무언가를 표상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기계들은 16,17세기 자연철학자들에 의해 자연을 표상하는 모형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우리가 역학적(mechanical 기계적) 모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계가 자연을 표상하는 중요한 모형이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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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30분 동안 얘기를 나누었으니까 내가 이곳에 와서 영어로 대화한 사람중에 가장 오래 얘기를 한 사람일 거다. -_-;; 어쨌든 그와 만나서 얘기를 하고 나니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해치운 느낌이 든다. 무척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리고 교수를 만나서 내 연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가 바로 무언가 조언을 해주진 않았지만, 이 사람이 내 얘기를 이해하고 있고 재밌어 한다는 느낌이 나를 안심시켰고, 다음에 또 만나서 이 사람한테 내 아이디어를 더 정교하게 말하고픈 욕구가 생겼다는 게 오늘 만남의 가장 중요한 성과인 듯하다.

아마 2주 뒤에 그를 다시 만날 듯. 다음번엔 오늘 한 얘기들을 좀더 정교하게 만들어서 한 장짜리 프린트를 만들어 가야겠다. 말이 너무 짧으니;;;

“Godfrey-Smith와의 만남”의 3개의 댓글

  1. 교수와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마친 어제, 부인도 나도 각자 부담스러웠던 일을 하나씩 끝낸 기념으로 닭다리구이 만찬 겸 요리 대결을 벌였다. 난 내가 요리 대결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부인님은 동의하지 않는 듯. 자세하지 않은 레시피는 http://blog.naver.com/bamiya/130045325434 에서 확인하삼. (아쉽게도 사진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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