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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Unow] 이영훈 교수를 옹호한다 by 아흐리만

“이영훈(53)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일제시대 정신대(일본군에 의한 성노예)를 두고 미군부대를 비롯해 도심 곳곳 성매매 업소에서 이뤄지는 성매매에 빗대 ‘정신대가 사실상 상업적인 목적을 지닌 공창의 형태’라는 일본 우익측의 주장을 대변해 논란이 예상된다”

오마이뉴스, 오전 6시 37분. 이로부터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다른 언론매체들이 서울대 교수가 정신대는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다고 기사화하기 시작했고, 서울대 경제학과 사이트는 초토화되었다.

▲경제학부 게시판은 마치 폭탄을 맞은 듯했다. ©  

그러나 녹취록 전문을 보든 VOD를 보든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이영훈 교수의 어법이 오해를 살 여지는 있었으나, 그의 발언을 통해서 그런 견해를 전혀 추론해낼 수 없다.

이영훈 교수는 문제의 발언이 있기 전, 즉 토론회가 시작한지 한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종군위안부 문제를 스스로 처음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일본군 위안부”라고 말했다가 좀더 엄밀하게 “그러니까 전쟁중 성노예”라고 고쳐 말하고 있다. 노예는 자발성이 없는 존재이므로, 종군위안부 피해자 여성을 “성노예”라고 칭했다는 사실은 이영훈 교수가 자발적 성매매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또한 성노예라는 명칭은 페미니즘 진영에서 정신대나 위안부와 같은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명칭에 반대하면서 국제적으로 전파시킨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이영훈 교수의 식견이 상식 수준 이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발언의 맥락 역시 이 명백한 추론을 뒤집을 수 없다. 이영훈 교수는 처음에 친일파진상규명에 깔린 전제가 도덕적 역사관에 기초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다음 발언 차례에서 그는 국가에 의한 인권 침해 범죄는 시효를 막론하고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맥락에서 앞서 말했던 종군위안부, 전쟁중 성노예라는 말이 처음 언급된다.) 그가 의문을 표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없이 일제의 관직에 있었거나 상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역사적이고 특수한 개념으로 과거의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재단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그리고 그것이 국가와 ‘법’이라는 제도적 장치로 이루어낼 일인가. 이것이 이영훈 교수의 맥락이었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민족’의 개념에 입각한 친일파 청산에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에는 서지 않았다. 이영훈 교수는 원론적인 비판을 제시하지만 이 의견을 완강히 고수하기보다는 정치인들이 ‘참작’할 것을 부탁하는 쪽이었다. 첫째로 그는 인권범죄에 포함된다고 보기 어려운 민족반역죄의 처벌에 회의적이지만 진상 규명에 총독부 관리 자료 등을 참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둘째로 그는 과거청산을 정치권에서 푸는 것이 아니라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풀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론의 말미에서 송영길 의원에게 “어차피 통과될 법이니까 시민단체의 자율권을 침해하지 않는 쪽으로 힘써주시길 바란다”라고 부탁한다. 여기에서 “친일파진상규명법을 저지하고 흠집내기 위해 안달”인 수구세력의 모습은 엿보이지 않는다.

괴물의 이름은 ‘일본 제국주의’?

이제 문제의 발언의 맥락으로 들어가보자. VOD를 열심히 본 내 입장에서 녹취록에는 몇몇 어구들이 빠진 듯 하지만, 그 점을 무시하고 오마이뉴스에 인용된 부분녹취록으로 사태를 판별해보자. 송영길이 말한다.

송영길 : “지적할 게 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의 문제와 지금 미군부대의 문제를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우익이 지금도 주장하는 것은 정신대가 총독부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종의 공창의 형태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미 증거자료에 의해 정신대는 조선총독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일종의 성적 노예 상태에 놓인 것으로 근본적으로 (미군의 경우와) 차원이 다르다”

이영훈 : “누가 주장했나. 어느 학자가 주장한 것인가.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동원했다는 게 명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이영훈 교수가 말을 끊고 발언한 이 부분을 보고 이영훈 교수가 “정신대는 자발적인 매춘부라고 주장했다”라고 확신한다. 이 부분만 떼어놓고 본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 현명한 사회자인 손석희는 이영훈 교수에게 정신대 문제에 대한 견해의 정리를 요구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영훈 : “정신대 관련 일본에는 2000점의 자료가 있고 그런 일본학자들에 경의를 표하고, 국내학자들이 노력도 많았지만 거기에 의존한 바가 많았다. 거기에 보면 하나의 범죄행위가 이뤄지는 것은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 민간인들이 가령 팸프. 한국 처녀,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업소 주인들이다. 그 명단이 있다”

그가 언급한 자발적인 참여의 예는 팸프, 그러니까 포주인 셈이다. 권력의 작동은 통치기관 하나의 작용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고 당연히 그에 참여하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존재한다. 이영훈 교수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사실이 “정신대 할머니들은 매춘부이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영훈 교수는 이미 이전에 피해자를 “전쟁 중 성노예”라고 지칭하였으며, 결정적으로 문제의 발언 다음에도 피해자들을 “성노예”로 지칭한다.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론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설령 팸프가 있다고 하더라도 조선 총독부가 관리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책임은 조선 총독부가 지는 것인데, 이영훈은 어째서 물타기를 하는가. 진중권조차도 시사저널의 칼럼을 통해 이처럼 한심한 소리에 가담하고 있다. (나는 몇 년간 진중권의 글을 봐왔지만 이번에 이영훈과 양동휴를 비판한 글만큼 맞는 소리가 한마디도 없는 글을 보긴 처음이다.) 두 번째 반론은 팸프를 언급하는 것은 사실상 정신대가 공창제의 형태였음을 이영훈 교수가 인정한다는 견해다.

첫 번째부터 반박해 보자.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 내부의 친일파에 대해 진상을 규명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잘못의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이 져야 하고, 친일파를 운위하는 것은 물타기일 뿐이다. 나는 이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역사적 판타지의 실체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은 대충 만화 사우스파크 정도의 그림체로 내 묘사를 머릿속에 그려보기 바란다. 1940년대, 조선총독부에 웬 괴물이 사육되고 있었다. 이 괴물의 이름은 ‘일본제국주의’다. 키는 에베레스트보다 더 큰 8888m, 얼굴은 8개에 눈은 4000개라 시선이 전 조선땅을 포괄하고, (모르도르의 사우론보다 무섭지?) 결정적으로 팔이 1008,000개나 되어 조선반도 모든 가정에 팔을 하나씩 뻗는다. 보이는 족족 순결한 처녀를 골라잡는다. 수십만의 처녀가 사로잡히자 팔을 하늘에 쳐들고, 중국에서부터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전 일본군 막사에 처녀들을 던져넣는다. 끔찍하고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지만, 있을 법하지 않기에 남는 것은 코믹의 여운.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한국인 범죄자의 존재에 경기를 일으키는가? 이영훈 교수가 말한 조선인 참여자가 피해자 여성이 아니라 그들을 관리한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물론 포주의 존재가 일제의 만행을 덮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점에는 이영훈 교수도 동의한다. 서로간에 이러한 판단을 공유한다면 학계의 대대적인 연구와 자발적인 성찰이든, 관련자의 엄격한 처벌이든 그 기반 위에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송영길 의원은 이영훈 교수를 “일본우익과 논리가 같다”고 재단했고, 그 과정에서 쌍방이 모두 흥분해버렸다.

두 번째 반론은 홍기빈이 프레시안 칼럼을 통해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논의지형에 대단히 무지하거나 정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홍기빈의 주장처럼 이영훈 교수의 말이 정신대가 상업적 공창제의 한 형태였다는 암시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단, 일본군과 포주에게만, 그리고 외양적으로만 그러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거기서 일하던 피해자들은 조선 땅에서 끌려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영훈 역시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토론과정에서 “성노예”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했다. 자발적이거나 상업적 대가를 받는 성매매라면 굳이 “성노예”라고 칭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대중들의 분노는 이영훈이 피해자 여성들을 매춘부로 격하(?)시켰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홍기빈이 이영훈의 해명서를 보고 재차 사실검증을 했더라면, 이영훈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짚어낼 수 있었을 게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여기서 대중이 분노하는 부분에 대해서 굳이 반론하지 않으려는 지식인의 기회주의를 읽는다. 분노하는 대중 앞에서 이영훈 교수에게 토론을 제기하는 홍기빈의 자세는 온당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홍기빈, 무지하거나 부정직하거나 © 프레시안

이영훈 교수의 의견은 친일파청산 문제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논의지형을 바꿔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전쟁중 성노예 문제만큼 인륜에 어긋나고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범죄에 한국인 포주가 개입했고 일본군으로부터 대가를 받는 공범 역할을 했다면, 이들에 대한 처벌은 일본군이나 일본경찰의 일정한 직급에 종사한 이들보다 훨씬 정당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학적연구의 토대가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친일파진상규명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영훈 교수의 말을 입증한다. 지금껏 정치권은 기준이 일본군 소좌니 중좌니, 헌병 오장이니 하며 서로의 득실을 재어왔는데, 전혀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순진하게 그래봤자 일제의 책임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이 새로운 문제를 억압하려는 시도밖에 안 된다.

억압받은 자는 누구인가

따라서 이영훈 교수의 발언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영훈의 무엇에 대해 분노하는지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정신대가 공창이라는 망언을 한 교수에 대한 분노? 그것은 TV토론보다는 강의에 익숙한 교수의 발언이 잘못된 언론보도를 통해 가공된 결과 생긴 해프닝이다. 그러나 “성노예와 성매매는 결코 동일선상에서 언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거나, “지식인이 친일청산규명법에 반대하는 것 자체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분노한다면 여전히 논점은 남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융합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거대한 분노가 생겨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인이 화를 내는 이유에 대해서 차분히 정리를 해본다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훈 교수 발언의 핵심은 정신대 문제가 해방 이후 한국의 여러 성매매 문제의 뿌리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의할만한 주장이다. 사실 과거청산을 운위하는 이유는 그 과거가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구속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제의 전쟁 성노예 문제는 그것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화와 인과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더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적어도 이영훈 교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한국인 포주뿐 아니라, 학도병으로 참가해 위안소를 이용한 이들의 자발적인 반성과 고백을 통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는 실제로 시행되어 온 일이고, 이것이 친일파진상규명법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친일파진상규명법 시행 이후에도 진정한 과거청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당신이 친일파진상규명법에 찬성하는 입장이고, 이영훈 교수의 논변의 합리적 핵심을 취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친일파진상규명법은 일제시대의 범죄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일 뿐이라는 합의를 통해 당신이 말씀하신 면죄부 효과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 최소한의 것을 시행하면서 학문적 연구와 자발적 반성과 고백을 이끌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대다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말은 물타기다. 따라서 당신은 수구세력이다” 그런 생각으로 법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모조리 수구세력으로 몰아붙인다면, 법안을 통해 예상되는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는 기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너무나 위험한 일 아닌가.

한국인의 자발적 참여라는 말에서 곧바로 자발적인 매춘여성을 떠올려 버리고 공분하는 것은, ‘순결한 희생자’ 상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화에 대한 윤리적인 비난을 피하면서, 아니면 적어도 성매매 문화와 일본제국주의를 연결짓지 않고 일본제국주의만 단죄하고픈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영훈 교수가 이 소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은 한국 남성 사회에 보편화된 성매매 문화와 연결되어 버렸다.

종군위안부 피해자가 강제로 잡혀갔음을 강조하고 그들을 매춘여성과 완벽하게 분리시키는 것은 일본군의 전쟁 성노예 문제를 분명하게 부각시키는 데에는 효력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매춘부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키고 ‘자발적 성매매’라는 환상을 더욱 공고히 하는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후자에 대해선 아무도 입도 벙긋 하지 못한다. 벙긋했다가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질타를 받거나, 그분들의 감정을 대리하는 이들에게 질타를 당할 것이다. 사과하러온 이영훈 교수에게 한 종군위안부 피해자는 “어떻게 우리를 동두천 여성과 비교한단 말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닌데 왜 학살했단 말입니까”라고 말했다는 민간인 학살 생존자의 말만큼이나 비극이다. 한 범죄의 피해자가 다른 범죄의 피해자를 경멸하는 것이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사태를 판별한다면, 여러 종류의 기준에서 볼 때 생겨나는 여러 부류의 피해자를 고루고루 고려하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의무다. 민족에 의해 신비화되고 깊숙이 감춰진 피해자를 자기 필요에 따라 호출해내며 다른 이의 견해를 억압하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억압받은 이는 이영훈 교수였을까, 아니면 이영훈 교수의 발언으로 억압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일까? 나는 명백히 전자라고 본다.

▲ 과연 누가 억압받았는가? ©  

이영훈 교수에게 경의를 표한다

따지고 보면 나는 이영훈 교수의 시각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영훈 교수는 민족에 대해서는 해체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국가체제에 대한 관점은 보수주의적으로 보인다. 그는 민족사의 관점을 인정하지 않으며, 국가체제는 존중하는 바가 있으면서도 시민사회의 영역과 뚜렷하게 분리하고자 한다. 나는 그보다는 일반적인 젊은이들의 관점에 (그러니까 민족적으로는 좀더 굳건하고 국가체제에 대해서는 그만큼은 존중하지 않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영훈 교수의 시각에 일리가 있으며, 체계성과 논리성에서 별다른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영훈 교수가 보여준 성실성과 전문성은 그가 서울대 교수이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서 매우 훌륭했다. 따라서 이영훈 교수와의 견해차는 토론을 통해서 극복할 문제이지, 손쉽게 매도해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특히 개혁을 운위하는 사람들은) 가령 임지현 교수가 해체주의자이며 허무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한다. 그러한 포지션 자체가 우리의 개혁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임지현 교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으나, 그런 비난은 위험하다. 어떤 입장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그 입장이 파악하거나 대변하는 합리적인 논점과 기준을 배제하고 세상을 재단하겠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손쉽지만 위험한 논리다. 이영훈 교수의 건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송영길 의원의 경우 위안부의 문제를 ‘일본’과 ‘한국’의 문제로만 바라봤기 때문에 이영훈의 사상의 지평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자신의 도식에 따라 “일본 우파의 논리”로 지목한 것이다. 나는 그의 행동이 악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한계에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영훈 교수의 주장 중 일부는 지식의 정치성을 고려해 볼 때 순진한 것이다. 안병욱 교수의 주장처럼, 서울대 김민수 교수처럼 친일 문제를 단지 언급만 하고도 쫓겨난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학계는 친일 문제에 대해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학계 스스로 친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견해는 천진난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지식인이 지식의 정치성에 밝아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지식인에게도 전공분야가 있고, 모든 지식인이 본격적인 사회참여 지식인은 아니지 않은가. 주로 연구에 종사하면서도 자신의 전공분야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 간혹 견해를 피력하는 지식인도 있을 수 있으며, 그런 지식인 역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학적 논쟁이 주책없이 정치적 맥락 속에 들어”왔다는 진중권의 주장은 매우 주책없는 소리다. 상아탑 지식인은 뭘 모르니 입닥치라는 얘기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사회참여 지식인들만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을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식인이 대중에 비해 전면적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부분에서 우위성이 분명할 경우 그에 합당한 존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지식인을 뭐 그리 대단한 교양인이나 계몽주의자로 상정하고 있지는 않다. 지식인을 전문가로 파악하기만 해도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의사들의 권위주의를 타파하자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 의사의 말을 존중한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비록 언론이 왜곡보도를 했다고는 하나, 이런 점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된 ‘대중’들의 행동은 결코 올바르지 못했다. 그들은 발언자가 하지 않은 발언으로 발언자를 비난했고, 발언자의 일관성 있는 논리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단죄했다.

많은 이들이 ‘지식인’에 대해 부정적인 상(象)을 가지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각론에는 강하지만 총론에선 자신이 어떤 맥락에서 이용되는지도 모르는 채 정치권력에 이용되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담론으로 대중의 견해를 억압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그러한 상에 부합하기는커녕 전문적인 조사를 통해 정치인들보다도 더 ‘대중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많은 시청자들이 별 관심없이 지나쳤던 부분이지만, 한국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이영훈 교수는 자신이 필드워크를 다니던 남부지방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인 상황을 겪은 마을들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을들 중 많은 마을의 ‘어른’들이 그 사실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최소한 아이들이 서로 손잡고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할게 아니냐며. 그리하여 민간의 상처는 겨우 아무는 중인데, 진상규명법의 내용엔 피해자의 신고가 있으면 가해자를 조사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 자칫하면 겨우 아문 상처가 다시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전체토론과정에서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조사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되었건 정부나 군대에 의한 학살은 조사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비일비재했던 민간인끼리의 학살 문제는 매우 신중해야 될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안병욱 교수의 답변은 “진실이 있어야 진정으로 상처가 아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지식인에 대한 부정적인 수사로 흔하게 운위되는, 계몽주의적인, 자기확신에 찬, 대중의 삶에 대한 고려가 없는 주장을 찾는다면 이 경우 누구의 주장이겠는가. 나는 오히려 안병욱 교수의 주장이라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이영훈 교수의 대안이 빛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인식을 가능토록 한 그의 성실한 학적 연구와 조사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진상규명에 대한 회의

나는 본래 친일진상규명법에 찬성하던 입장이었다. 이 법안이 반민특위의 입법만큼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친일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친일파의 후손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친일파 문제를 햇볕에 꺼내어 언급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정신병리현상에 대한 치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찬성했다. 또한 이영훈 교수가 지적한 입법의 포괄성과 자료의 미숙함도 이 법안이 처벌을 위한 법안이 아니라 진상규명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커다란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 월간조선

그러나 한 양심적인 교수의 소신 있지만 서툴렀던 발언이 언론매체를 통해 왜곡되고, 대중들을 들끓게 하고, 급기야 집단적인 분노의 광기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 도대체 내 눈에 명백하게 보인 것이 왜 이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영훈의 제스처의 오만함에 분통을 터트리고, 그의 뉘앙스를 끌어내어 재단한다. 녹취록 구문의 연결구조만 봐도 파악할 수 있는 ‘의미’를 왜 뉘앙스까지 동원해서 재해석해야 하는가. 여기서 나는 최장집의 “역사적 결단”이란 어구에서 김일성에 대한 찬양을 읽어냈던 월간조선의 편집증과 동일한 것을 본다.

피해자에게 맡겨 처단해야 한다느니, 각론은 알지만 총론엔 무지하다느니 하는 책임지지 않는 말의 성찬 속에서 피로감을 느낀 후,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마이뉴스가 이영훈 교수에게 손해배상을 하는 그 날, 저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자발적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 혹은 법원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며 손해배상금 대신 내주기 모금운동이라도 벌일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옳았고, 나는 대중의 건전한 상식을 신뢰한다는 의견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그런 말들에 나는 절망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난, 하나의 원본텍스트를 가진 사건을 두고도 이러한 전쟁을 벌여야 하는데, 우리의 양식(良識)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나의 글은 무척 길다. 그러나 3시간에 걸친 토론의 녹취록보다는 짧고, 60년의 간극을 둔 몇십년 역사의 퇴적에 비하면 형편없이 짧다. 만일 당신이 이 글 정도도 길다고 꼼꼼히 읽지 않는다면, 한 인간에 대해 청산이니 처리니 하는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은 없다.

“[SNUnow] 이영훈 교수를 옹호한다 by 아흐리만”의 3개의 댓글

  1. 도대체 이사람, 진보누리에든 스누나우에든 글 길게 쓰는데는 모 있다니까..

    누가 ‘서울대 교수가 정신대를 공창이라고 했대’라는 말을 듣고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가.. 솔직히 그말을 첨 들었을 때는 그게 뭔말인지 생각도 안했었다. 그러다 오늘 스누나우에서 기사를 보고 연합뉴스 단신을 보고서는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정말 뭐 이런 기막히는 일이 다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째 한숨만 푹푹 나왔다..

    이런 사건에 대해 연합뉴스 단신은 어떻게 나왔냐 하면 이랬다..

  2. [연합] 서울대 교수 `정신대’ 발언에 항의 빗발
    2004년 09월 05일 박상돈

    (서울=연합뉴스) 박상돈 기자 =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53) 교수가 MBC `100분토론’에서 일본군 정신대를 공창 형태의 성매매업소에 빗댄 사실이 알려지면서 3일각계의 항의가 쏟아지고 있다.이 교수는 2일 저녁 `과거사 진상 규명 논란’이란 주제의 방송토론에 패널로 참석, “한국 전쟁 당시 한국인에 의한 위안소나 미군 부대 근처 텍사스촌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성과 성찰이 없다”며 일본군 정신대를 미군 부대 성매매업소에 빗댔다. 이 교수는 또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했다고 어느 학자가 주장하느냐”며 “일본은 정신대를 관리한 책임이 있지만 한국의 민간인 문제도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 교수의 발언이 전파를 타자마자 MBC `100분 토론’ 게시판과 서울대경제학부 홈페이지,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는 네티즌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이 교수의 교수직 사퇴를 요구했다. ‘보통사람’이라는 아이디의 한 네티즌은 포털사이트에서 “100분 토론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글을 올린다”며 “정말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 교수가맞느냐”고 비판했다. 아이디가 ‘한국인’인 네티즌은 “한국 최고 대학의 교수라는 사람이 위안부가 상업적인 매춘부라고 하니 정말로 어이가 없다”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교수직에서사퇴하라”고 요구했다. 정대협도 이날 성명을 내고 “이 교수의 발언은 일본 우익 중에서도 극우익에서나 나오는 주장으로 우리를 경악과 분노에 떨게 한다”며 이 교수의 공개사과와 교수직 사퇴를 촉구했다. kaka@yna.co.kr

  3. ‘나눔의 집’ 방문 기사 중..

    “대체 뭘 사과했는지 물어봐야 겠다”며 김군자 할머니는 역사관을 견학하는 이영훈 교수를 밖에서 기다렸다. 할머니는 그것이 묻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양색시와 같으냐? 다르냐?” 이영훈 교수가 나오자마자 할머니는 그를 불러 옆에 앉히고는 “아까 뭘 사과한 거냐?”고 물었다. “제가 마음에 상처를 드렸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대답에 할머니는 다시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한다. 3일 내로 호적등본을 떼어오라”고 말했다. 이영훈 교수는 “왜 양색시와 우리를 비교했냐?”는 질문에 “그 사람들도 불쌍하다는 뜻이었다”고 말했고, “불쌍하든 어쩌든 걔네들은 돈 벌러 간 거 아니냐?”고 되묻자 “지당한 말씀이다”라고 받았다. ‘지당한 말씀’이라는 한 마디를 듣자 할머니는 “됐다. 그만 가보라”고 했다.

    ….. 뭐라 말도 못하겠고.. 씁쓸한 한숨만 계속 나온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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