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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쿨하고 자빠졌네 by 박민규 소설가

뭐야 뜨겁잖아 아닌 게 아니라 요즘 가장 뜨거운 단어를 고르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쿨’에 밑줄을 칠 것이다. 이런저런 잡지들과 이런저런 출판물들이 연이어 ‘쿨’을 분석하고 해체하는가 하면, 쿨을 이해하지 않고선 젊은 세대의 트렌드를 따라잡을 수 없다 -뭐 그런 전제 아래, 쿨이 문화계 전반의 화두가 되어버린 지도 이미 오래다. 아니 확실히, 어느 편이 닭이고 달걀인진 알 수 없지만, 운동장에서 뛰노는 어린아이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쿨은 보편적으로 ‘좋다’, ‘멋있다’, ‘패션이 멋지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그러는 건지, 그리하여 그리된 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지금, 우리는 쿨하다. 상당, 하다.
일각에선 쿨을 새로운 개성과 삶의 양식으로 정의한다. 쿨하게! 재즈를 들으며, 또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너나할것없이 우리는 스스로의 삶이 쿨하기를 바라왔다. 그건 최선이자 유일한 탈출구였어. 아냐, 세대를 가로지르는 저항의 정신이었어. 옥스퍼드사전을 봐. 쿨은 이미 ‘흥분과 열정의 기운을 잃은, 덜 열광적이고 열심인, 그러면서도 열정과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흥분하지 않고 심사숙고하고 조용한’으로 – 정의된 지 오래야. 미국의 통계를 빌려볼까 글쎄 대학생들의 91%가 ‘쿨’을 사용한다는 자료가 발표되었어. 그건 나르시시즘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며, 뭐랄까 역설적 초연함인 동시에, 그 기원은 고대 서아프리카의 종교윤리에서 온 것이라고나 할까 – 탁, 잡지를 덮으며 나는 중얼거린다. 상당, 한 걸

비판도 상당하다. 쿨한 젊은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정치적 무관심이다. 이혼율 높아진 거 봐라. 세계 최고라며 어쩜 동거를 밥먹듯이 하니 그래서 한마디로 이기적으로 살겠다, 이거 아닌가 나라의 앞날이 큰일인걸 이거야 원, 피라미드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는, 수천년 전의 ‘요즘 젊은것들은 안 돼’가 아닌가. 50년 전부터 그 소릴 들어온 비트족처럼, 나는 탁, 다시 읽던 잡지를 다시 덮는다. 그래서 당신은, 뜨겁나 보지

이 뜨거운, 사회 전반에 걸친 쿨의 발현과 조명이, 하지만 나는 탐탁지 않다. 뭐랄까, 마치 ‘용각산’ 같다.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쿨은 애당초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미세한 분말 같은 마음이, 양철의 몸통 속에서 소리 없이 흔들린다. 그런, 기분이다. 아니 고백건대, 사실 우리는 눈곱만큼도 쿨하지 않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드라마여, 잡지여, 영화여, 논객들이여. 제발 우리가 쿨하다고 조장 좀 하지 마라. 글쎄 그건, 우리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니까. 그저 내가 보기엔, 뜨겁게 살고 싶어도 뜨겁게 살 수 없는 젊은이들이 이 땅에 있을 뿐이다. 기를 쓰고 쿨하고 싶어도 – 시무룩이나 시큰둥, 또 썰렁함 이상은 할 수 없는 청춘들이 이곳을 메우고 있을 뿐이다. 답답해. 글쎄 이건 트렌드가 아니라니까. 부탁이야. 제발 좀 쿨하다고 말하지 말아 줘. 자꾸만 체온이 내려가. 멋진 것 같아 고맙긴 한데… 추워.

쿨은 오직 정치인들의 몫일 뿐이었다. 방탄 국회라니. 이 얼마나 열정과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흥분하지 않고 조용한가. 정말이지 세대를 가로지르는 저항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고 – ‘핫’해봐야 소용없고 ‘쿨’하기엔 가난한 이 나라에서 나는 심사숙고, 한다. 2004년이다. 나도 우리가 쿨했으면 좋겠다. 아니, 실은 누구나 쿨하게 살고 싶다. 영화 〈똥개〉에는 “내는 니가 쪼매 쿨하다고 생각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탁, 이 글의 마침표를 찍는 지금, 꼭 그런 기분이다. 언젠가 그런 덕담을, 우리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새해마다, 모든 어둠 살라먹고 – 말갛게 솟은 해를 보며 내내 그런 덕담을 나눈다면 좋겠다. 쿨하게, 해야,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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